1. 왕과 중전이 동침할 때 상궁이 지시했다.
→ 거짓. 실록이든 승정원 일기든 왕이 집무를 마치고 침전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되지 않음.
폐비 윤씨나 장희빈의 비행이 실록에 기록된 이유는 왕이 직접 증언했고 '왕실의 집안일'을 넘어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됐기 때문임.
실록에 기록되는 건 왕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지, 왕이 사석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아니다.
2.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남김 없이 기록한다.
→ 대체로 거짓. 태종을 스토킹했던 사관 민인생 일화는 기록 형식이 부재했던 조선 초에 일어난 해프닝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이 업무를 마치고 침전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있는지 기록되지 않음.
왜? 사관도 퇴근하니까.
민인생이 실록에 이름 석자 남긴 이유는 무슨 참된 사관의 전형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정신이 나간 놈도 있었다는 박제에 가까움.
중종 시대에 조광조가 침전에도 사관을 들여서 왕의 모든 행적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그러다가 호감스택 쌓여서 결국 숙청됐음.
3. 조선시대는 보정이라고 하는 춘화를 교재로 사용하는 성교육 제도가 존재했다.
→ 거짓. 보정이라는 단어는 사용됐지만 이건 모름지기 사대부라면 색욕을 멀리해서 '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
무슨 체계적인 성교육 커리큘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다.
가끔 보정을 근거로 조선은 은근히 성적으로 개방적인 나라였고 작금의 폐쇄적인 성문화는 기독교에서 온 것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데 애초에 보정이 루머와 불과하니 이 주장은 전제부터 틀려먹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음
4.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갈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대체로 거짓. 일본 다이묘들은 성이 함락되면 할복했기 때문에 군주의 도주는 겪어본 적 없었다-
가 이 주장의 주된 논지인데 천황이든 쇼군이든 다이묘든 도주할 곳이 있으면 당연히 튀었다.
당장 오다 이전에 일본을 통치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도 교토에서 쫓겨났다고
다 끝이다 배 가른 게 아니라 우호 세력에 몸을 맡기고 재기의 때를 노리고 존버했다
영지가 모조리 타군에게 점령되어 도주할 곳도 없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재기의 가능성도 없다
정도의 극한 상황이라야 게임 조까치 하네 하고 배 가르고 저승으로 퇴갤했다.
보통은 내가 졌다 너를 따르겠다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가 됐다.
왜군이 정말로 몰랐던 것은 한반도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당시 왜군 지리 감각은 한반도 = 큐슈 사이즈(실제로는 거의 6배 차이)
였기 때문에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한참을 더 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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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지만 현대에서 성에 대한 규제에서 기독교 영향이 없다곤 전혀 못하지
조선이 자유로웠냐 어쨌냐는 몰라도 현대의 모자이크 검열은 일본식 검열 가져온 수준이고
기독교 단체가 앞장서서 탄압하는건 맞잖아
애초 성 문화는 탄압한다고 탄압되는 그런것도 아니라 청교도 국가던 불교국가던 매춘부는 있어왔고
주장의 근거부터 사실이 아니라면 일부가 사실이더라도 긍정하기 어렵지.
뭐 보정 성교육설은 근거 없는건 맞으니까
하지만 기독교에 의해 현대 한국 성문화 탄압이 주도되는건 사실이니
YMCA 등
주관이 된 단체 근간은 기독교 쪽이고 이쪽이 더 성적으로 폐쇠된게 맞는데
그게 조선, 유교 탓인것도 마찬가지로 억울한것이지
혼슈보다 약간 작은데 큐슈 사이즈로 알았다니...
근데 당시엔 오히려 조선이 더 큰 나라인 줄 알았다는 말도 있던데 아니었나
당시에는 조선이나 일본이나 서로서로 졸라 작은 나라로 생각했다고 들음
그건 조선의 일본 인식. 일본이 조선보다 작은 나라라고 생각했음.
서로서로 자기나라가 짱크다고 생각함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면 조선이 생각한 자국 크기 짱크지
침공한 왜군은 물론이고 조정조차 예상 못한 일-선조가 요동으로 빤스런 시도
의주까지 따라간 신하들이 기겁한
1번은 신경쓰여서 예전에 검색해봤는데 암만 검색해도 어떤 책 하나만 나오고 나머지는 그 책에 적혀있는거 인용한거더라.
일단 내가 찾을땐 다른 자료가 안보이던데
길한 날에 합궁했다 정도만 알려져 있지 나머지는 뭐
저 사관 관련해서는 민인생이 표본이 되서 이후 사관들도 다 그랬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긴 하더라. 그냥 그때 아직 교통정리가 안되서 일어난 사고 같은거고, 이후에는 잘 정리해서 그런 일이 없었던건데.
전근대에는 여진, 거란족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조선을 엄청 크게 알았음
그래서 왕이 반대쪽으로 튀면 쉽게 못 쫓아갔음
어디까지 북상(남하)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니까
보통 사절을 보내도 딱 수도까지만 가는데, 그 뒤로는 잘 몰라.
비슷하게 조선도 일본, 만주 크기를 가늠 잘 못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