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들이 "원한은 알지만 복수는 안된다, 복수는 공허한 것"이라는 전개를 극혐하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창작물은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도록 설계되며, 복수 서사에서는 특히 이 감정의 흐름이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복수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관객을 감정적으로 이입시키면서도, 마지막 순간 복수를 부정하는 전개를 택한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교훈을 강조하는 방식이 강압적으로 느껴지면, 관객은 자신이 따라온 감정선이 부정당했다는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일부" 창작자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대중들이 현실과 창작물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태도다.
하지만 현실의 대중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질서를 충분히 준수하고 이해하고 있다.
복수가 실제 세계에서 허용되지 않으며, 법과 도덕이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그저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의 창작물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기회를 원할 뿐이다.
하지만 꽤 많은 창작물들이 이러한 대중의 감정적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작품 속에서도 도덕 혹은 인간성을 말하며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전개를 선택한다.
복수 서사는 일반적으로 "피해 → 고통 → 분노 → 복수 결심 → 실행"의 단계를 따른다.
창작물은 관객들이 이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유도하며,
복수의 정당성을 고려하기보다는 피해자의 감정을 최대한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억울함과 분노를 극대화하면서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복수자의 입장에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그래도 복수는 해서는 안 된다"나 "용서가 미덕이다" 이런 메시지가 강하게 들어올 경우,
관객의 감정적 기대가 차단되면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머리로는 복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이 서사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배신감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라스트 오브 어스 2》다.
게임 내내 엘리는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며, 플레이어도 그녀의 감정을 따라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엘리는 갑자기 복수를 멈추고 가해자를 놓아준다.
이 과정이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면 몰입감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플레이어가 따라온 감정선과 비교하면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이 때문에 "복수는 허망하다"는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플레이어에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허탈함만 남겼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복수를 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그 선택을 납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 복수가 이루어지는 작품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중들에게 강한 반감을 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수의 정당성을 고민하게 만들지 않고,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존 윅》 시리즈가 대표적인 사례다.
존 윅은 피해자로서 철저히 몰아붙여진 상태에서 복수를 시작하며,
영화는 "복수가 도덕적으로 옳은가?"를 고민하지 않고, "존 윅이 어떻게 복수를 수행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그의 감정을 따라가며 복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조차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는 복수의 도덕성을 논하는 순간 감정의 흐름이 깨질 수 있음을 이해하고, 아예 그 논의를 생략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또한, 복수가 허용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폭력의 연출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의미 있는 성장이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거부감이 줄어든다.
《레옹》의 경우, 레옹과 마틸다는 복수를 수행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틸다가 성장하고, 레옹이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서사를 통해 이야기가 완성된다.
이처럼 복수가 단순한 감정의 해소를 넘어,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지는 경우, 대중들은 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결국, 요즘 대중들이 "복수는 공허한 것"이라는 전개를 극혐하는 이유는, 감정의 흐름을 억지로 차단하는 방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법과 도덕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창작물에서조차 감정적인 해소를 막아버리면 관객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을 죽이고 살아남은 인간이 해피엔딩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냐?"라는 식으로 결말을 내면,
이는 단순한 교훈을 넘어 관객의 감정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창작물에서 복수 서사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를 허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복수를 원하는 감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복수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것이 감정적으로 자연스럽고 서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면, 대중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선을 따라가도록 설계해 놓고 마지막 순간 그 감정을 부정하는 전개가 반복된다면,
앞으로도 "복수는 공허한 것"이라는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극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시켜보고, 잘 알았습니다.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않습니다. 유족을 고인으로 했습니다만, 그 고인에게도 친족은 있겠죠. 그 친족은 반드시 저희들을 미워해, 보복을 노리고 있을게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저희들을 노리면, 저희들도 스스로를 방위하기 위해 반격해야만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원환과 같이, 증오의 사슬은 연쇄되어 가겠죠"
그런, 복수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현실을 가면의 남자는 말한다.
그리고, 다시 서젝스와 눈을 맞추었을 때, 그 눈은 곡옥이 떠오르는 불길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인내해서 그 증오의 연쇄를 끊어주세요"
너무나도, 후안무치인 발언에 서젝스는 결국 말을 잃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전신화에 요구하고 있던 것이라고도 자각해, 몸도 무너지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르네와 비슷한 증상이였다.
"뭐, 저는 강도고, 이후로도 쭉 폐를 끼치겠죠. 당신들이 몇번이고 화단에 꽃을 심어도, 그때마다 날려버리겠죠. 하지만, 그런데도 참아주세요. 왜냐하면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그저 허무한 것일 뿐이니까.【상냥함을 잃지 말아줘. 약한 사람을 돌봐, 서로 도와, 어느 나라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려고 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줘. 설령 그 마음이 몇백번 배신당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야】당신이, 고작 한번의 좌절로 취지를 바꾸지 않는, 강한 의사의 소유자임을 바라고 있습니다"
요약: 복수는 허무것도 아무것도 낳지 못하며 또다른 원한이 생길 뿐이다. 맞아요, 그러니까 이제 당신들이 우릴 용서해서 복수의 연쇄를 끊어줘요. 용서하라면서요? 자, 당신들이 우릴 용서해 봐요.
구구절절 옳은 글이야
인연 같은 모든것을 다 불태워가면서
아무것도 남지않는 공허한 복수를 완성하느냐
아니면 복수 도중에도 틈틈이 인연을 쌓아둔 덕분에
가슴 아픈 복수 이후에도 미래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느냐
이렇게 그냥 자연스러운 전개를 보여주면 되는데
냅다 "복수는 나쁜거야!" 해버리면 납득이 당연히 안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