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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ower | 04:28 | 추천 1 | 조회 2312

중소기업은 어떻게 안 망할 수 있는 걸까요.(3일 만에 퇴사한 이야기ㅋㅋ) +218 [14]

SLR클럽 원문링크 https://m.slrclub.com/v/hot_article/1311062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몇 년 씩이나 존속이 되는지...

잘 다니던 직장을 개발 공부해본답시고 그만두고서 1년 가까이가 지났습니다.

근래에 개발자 채용 시장이 어렵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할 정도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뭐 인사담당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비전공자인데다가, 전문대출신, 게다가 나이도 서른 둘!

기왕이면 4년제 나온 전공자를 뽑고 싶겠지요. 거기에 기왕이면 아직 머리가 말랑말랑한 녀석으로요.



그러다가 두 달 전에...
한 회사에 메일 보내고, 전화 넣어서 간신히 얻은 면접 기회.. 거의 사장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다시피 호소해서 간신히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진짜 개 코딱지만한 회사입니다. 사람인에는 사원수가 15명이라고 되어있지만 막상 출근하니 사장, 부사장 포함 6명입니다. 저를 포함하면 일곱명. 2020년 쯤에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이런 회사는 즉시전력감이 필요할텐데 왜 나를 뽑은거지...? 하는 의문과 함께 어쨌건 사장님께서 나를 믿고 뽑아주셨다,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며 의욕 충만하게 첫 출근.


11시쯤 사장께서 헐레벌떡 출근 하시더니 본인 책상 주변으로 직원들 모읍니다.

회의합시다 회의 야인마 빨랑와 빨리 앉아 다들!

그렇게 첫 주간 업무 보고(로 짐작되는...)를 시작합니다.

직원들이 각자 돌아가며 지난주에 수행한 업무와 금주에 할 업무에 대해 말합니다.

저는 신입인고로 할 말이 없어 자기소개나 하고 열심히 배우겠다는 말이나 한마디 던집니다.

감사하게도 직원분들도 한 분씩 자기소개를 해주십니다. 30대가 없습니다 전원 20대 입니다;;

직원들의 보고(?)가 끝나고 사장님의 일장 연설이 시작,

야 지금 위기야 위기 어, 지난달에 200벌었다 이게 말이 되냐? 니들 한사람 인건비도 안 나와 너 ㅇㅇ이 저기랑 미팅뭐래? 날짜 잡았냐? 야 나만 일하냐? 나만? 이게 말이 되냐? 니들이 나가서 뛰어가지고 일을 물어와서 나한테 보고를 하고 하는거지 내가 나가서 일 물어와서 니들한테 보고하냐? 야 이번주는 전부 나가. 아무도 사무실에 있지마 다들 나가가지고 영업해와!

뭐 대충 이런 내용을 속사포처럼 다다다다다 쏘시더니 또 어딘가로 사라지십니다.

중소기업을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좀 새롭습니다. 지난달 매출 200...?

전임자 따위는 진작에 퇴사해서 없기 때문에 전임자가 남겨 두고간 PDF 2페이지 분량의 허접한 인수인계서를 보면서 대충 업무를 파악하는 시간을 혼자 조용히 가집니다.


부사장님이 부르시더니 담배를 하냐고 물으십니다.

사실 반 년 전에 끊었지만 부사장님의 얼굴을 보니 개꼴초가 틀림없어 보여서 피운다고 말씀드립니다.

곧장 흡연장을 알려주신다며 따라 나오라 하셔서 따라나갑니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업무가 주어집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내린 첫 업무...! 충실히 수행하겠다 다짐합니다.

근데 업무가 좀 이상합니다.

저는 분명 개발자로 들어왔을텐데, 거래처(아직 거래처가 아니지만 거래처로 삼고 싶은...ㅡㅡ;;) 두 군데 미팅을 잡고 제품 브로셔를 제작하라는 내용입니다.

영업 담당 직원이 따로 있습니다.

디자이너 직원도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나한테 이런 업무를...?

의문은 들지만 아직 본인은 입사 2일차, 뭐든 시키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자! 잘 할 줄도 모르는거 구글링 해가며 뚝딱뚝딱 해봅니다. 업체와도 전혀 어떠한 채널이 없어서 걍 본사에 전화 때립니다..ㅋㅋ


그리고 대망의 사흘차, 출근해서 우리회사 플랫폼 입점 업체 실적을 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부릅니다.

책상으로 갔더니 이번주 내에 플랫폼 입점할 업체 10군데 이상 영업을 해오고, 거래처(로 만들고 싶은 업체) 두 군데 미팅을 다음 주 중에 잡아서 협의를 진행하라고 합니다.

뭔 내용을 협의하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입사한지 3일차일뿐만 아니라 저는 개발자인데...;;

자리로 돌아와서 문득 근데 나 개발은 언제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나이 먹고 연봉 2700 준다는 회사에 머리 숙여가며 들어온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어떻게든 시작해서 빨리 개발 현업을 경험하고 일을 익히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아직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사장님 자리를 보니 이 인간 또 자리에 없습니다.

옆 직원께 사장님 어디가셨냐 물어보니 오늘 지방내려가서 안올거라 합니다...ㅋㅋ

-사장님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그냥 제가... 지금 시키시는 일들 보면은 영업... 같아서요. 이게 맞나 싶어서 직무에 대해 좀 여쭤보려구요.

-어라? 영업직으로 들어오신거 아니에요?

예? 저 개발자로 들어온건데요?

-우리 회사는 개발자 없는데요?

예?

이게 뭔 개소리인지. 분명히 면접 볼 때 개발 얘기를 했고, 제가 우리 회사 서비스 소스코드랑을 다 관리 할 거라고 그런 얘기를 나눴었는데...?!

도저히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사장한테 전화 날립니다.

사장님 저 개발자로 뽑으신거 맞나요?

-내일 얘기합시다

사장님 저 절박합니다. 저한테 개발 안 시키실 건가요?

-내일 얘기해요

사장님, 우리 서비스 소스 코드가 아예 우리 회사에 없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이거 제가 직접 관리할거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왜 필요한데요, 외주 준 업체에서 다 알아서 할거야 걔네 잘해

그럼 저는 뭘 하나요?

-우리 제품을 일단 얼른 배워가지고 알리고! 팔고! 회사 먹여살려야지!

ㅎㅎ...

그 길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건 뭐 취업사기에 가까운...ㅋㅋ

사장님께선 사람이야 또 뽑으면 되기 때문에 전혀 붙잡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그날 저녁과 주말에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라고...ㅋㅋ;;


이 작은 회사의 수익 창구는 어떠한 기계 판매 수익과, 운영중인 플랫폼의 입점업체들에서 받는 수수료. 이렇게 두가지 인데요

지난달에 기계 판매 수익이 200이고... 운영중인 플랫폼의 최근 3개월 매출이 180이었습니다. 수수료가 10%이기 때문에 회사의 최근 3개월 수익은 18만원인 셈이지요.

회사도 망하지 않는게 신기하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사장님도 나름대로 기껏 뽑아달라고 사정사정 하는 불쌍한놈 뽑아줬더니만 3일만에 때려쳐서 기분 나쁘시겠지만

저는 저대로 드디어 개발자 취업했다!!! 어쨌건 노력하니까 되는구나! 이제 진짜 열심히해야지!! 이렇게 의욕을 마구마구 충전을 해뒀다가,
그게 무언가 한순간에 다 날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50군데 정도 더 입사지원을 넣었지만 역시나 어디서든 입사하기 쉽지 않았고

이제 2024년이 끝나가는 지금 시점까지 아직 백수입니다.

이제는 더이상 개발자 직무에 입사 지원을 하지 않습니다.

개발자 할 생각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올 한 해 배운 것들과 투자한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안되는 것에 계속 얽매여 있을 수는 없기도 하니까요 현실적으로.



회사가 월 매출 200이 나와도 이상하게도 사장은 법인차를 k3에서 제네시스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월 매출이 200 이어도 회사는 5년 째 안망하고 굴러가고 있네요

정말 신기합니다.

저는 올 한해를 날리고 이제 뭐해야하지 하는 고민에 휩싸여있는데, 어쨌건 지금 이시간에도 능력껏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있다는것도 신기합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주말에는 애인이랑 쉬고 놀러가기도 하고.
이 나이쯤에는 결혼도 생각하고.

저한테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니었지만 작년에 일을 관둘 결심을 하고선 많은게 멀어졌습니다.

여자친구도 사라졌고, 월급도 없어졌고, 직장도 없고, 앞으로 뭘해야할지도 감이 안잡히네요! ㅎㅎ

이 새벽에 사람인 뒤적거려보다가 문득 열이 받아서 쓸데없는 장문을 또 끄적여봅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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