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카이사르 빠돌이가 쓴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인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브루투스와 나머지 암살자들이 동방속주들을 수탈하는 동안 카이사르파 역시 신나게 수탈을 벌였기 때문.
첫번째로 안토니우스는 장례식에서 했다는 연설이 무색하게도,
(셰익스피어가 쓴 내용은 당연히 아니지만 연설을 하긴 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47년 동안 이집트에 있을 때 불법적인 군사활동으로 로마시민들을 학살하고,
로마시민들의 재산을 역시나 불법적으로 강탈한 다음,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에게 살해협박을 하고,
화룡점정으로 불법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한 주제에 개선장군처럼 로마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어그로를 있는대로 끌었다.
카이사르가 1년만 늦게 귀국했다면 거의 실각했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지1랄이었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4057158
카이사르는 귀국하자 마자 안토니우스를 해고하고 이탈리아를 레피두스에게 맡긴 뒤 아프리카와 스페인의 내전을 마무리 지었으며,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45년에 먼저 카이사르를 찾아가기 전까지 이 둘은 2년 동안 아무런 교류없이 지냈다.
즉,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던 기원전 44년이면 정치경력을 다시 시작한지 1년도 안된 시점이며,
대다수 민중들이 기억하던 모습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남의 재산을 멋대로 강탈한 주제에 개선장군 행세를 하던 미1친새끼였던 것.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민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을래야 높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초대황제가 되는 옥타비안은 더더욱 심각했다.
얘는 일단 눈길을 끌만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감각이 딸리던 내전 초반에는 인기가 끔찍하게 없었다.
일단 안토니우스의 동생과 첫번째 부인이 이탈리아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반란군의 핵심 인물들은 안토니우스 눈치가 보여 그냥 보내주고,
뜬금없이 반란군이 점령했던 마을을 배반자로 몰아 학살하고 약탈했다.
그 뿐만 아니라 반란군들 중에 300명은 자기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신전 앞에서 인신공양해버린 것은 덤.
또 기원전 43년 필리피 전투 이후에 퇴역군인들이 넘쳐나자,
옥타비안은 퇴역군인들에게 퇴직금과 농토를 마련해주기 위해 수많은 이탈리아 농민들의 땅을 아무 대가 없이 몰수해버렸는데,
(당연히 동류집단인 귀족친구들의 토지는 전혀 안건들였다)
이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바닥을 치고 때마침 기원전 42년 시실리에서 ㅅㅅ투스 폼페이의 반란까지 일어나 곡물수입이 틀어막혀 버린다.
농사를 잘 짓는 수많은 농부들이 실업자가 되버리고, 식량을 외부해서 수입해 올 수도 없어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고,
옥타비안은 ㅅㅅ투스를 시실리 총독으로 인정하고 추후 집정관 출마를 허락한다는 타협으로 곡물 수입길을 열어 기근을 겨우겨우 면했다.
하지만 ㅅㅅ투스와의 정치적 타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타협이 체결된 1년쯤 지난 기원전 38년에 뒤통수를 까고,
기껏 뒤통수를 까놓고 해전에서 개처발려서 이탈리아의 기근만 더 극심하게 만드는 추태를 부렸으며,
결국엔 기원전 36년에 갈리아에서 소환된 아그리파와 아프리카를 통치하던 레피두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시실리를 평정하기까지 6년 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되었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8219155
이 당시 땅을 이미 빼앗긴 이탈리아 농민들은 산적이 되어 식량이 있는 대도시들을 습격했고 식량폭동이 일상이 되었는데,
로마시에도 굶주리는 시민들이 많아 옥타비안을 출근길에 습격해서 죽일려고 했다.
다행히(?) 옥타비안의 사병들이 성공적으로 시민들을 죽여서 살아남았고,
옥타비안은 더더욱 끔찍하게 인기가 떨어질수 있었다.
또한 옥타비안과 안토니우스 모두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탈을 저지른바 있다.
정확하게는 필리피 전투 직전에 독재관 술라의 방식과 동일한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는데,
정치적 숙청도 있었지만 별다른 정치적 이유 없이도 부유한 시민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한 숙청 역시 벌어졌다.
이는 HBO 드라마 ROME에 잘 드러나 있는데,
숙청대상을 정할때 옥타비안의 어머니가
'내 딸 친구가 마음에 안든다. 걔 아버지 채석장해서 돈 많으니까 죽여버리고 재산은 우리가 꿀꺽하자'
라고 말하고 그대로 채택된다.
물론 실제 옥타비안의 어머니는 이미 사망한 시점이라 고증에 맞지 않지만,
숙청대상이 선정된 방식은 꽤 정확하게 묘사한 셈.
그 뿐만 아니라 옥타비안과 안토니우스 모두,
필리피 전투 직전에 이탈리아의 농민들에게 수확량의 50%를 징수하여 전비를 마련했다.
더 역겨운 점은 이게 처음에는 귀족 여인들의 재산에 과세를 하려다가,
귀족들이 반발하여 실패하자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농민들을 수탈한 것이라는 점.
즉, 옥타비안이 멋대로 토지를 대가도 없이 빼앗아 실업자로 만든 그 이탈리아 농민들은,
이미 빼앗기기도 전에 자의적이고 불공평한 세금으로 수탈 당하고 있었다는 뜻.
이쯤되면 뭐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속주들을 수탈한거랑 뭐가 다른건지....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권력을 공고히하는 과정을 보면,
옥타비안과 안토니우스는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둘 다 초반에는 대중적 지지기반이 탄탄하다고 보기 힘들었고,
둘 다 정권유지를 위해 권력을 무자비하게 남용했으며 그 여파로 서민들의 고통을 유발했다.
둘 다 통치력을 다지는 과정에서 권력을 잃지 않은 것은 그저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사병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이 둘이 다른 점이라고는 그저 옥타비안의 전무한 군사적 능력을 채워준 아그리파가 많이 유능했고,
그 덕분에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처참하게 실패하고 이를 동맹국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묻을 때,
옥타비안은 아그리파의 도움으로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치울 수 있었다는 정도다.
'로마인 이야기'로 로마사를 접한 사람들은 로마제정으로의 길이 카리스마 있고 민중을 위하는 카이사르와 그의 유지를 이은 양아들 옥타비안의 일대기인줄 착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런 동화 같은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이 시대는 공화정이 극심한 양극화와 자극적이고 공허한 선거용 포퓰리즘 속에서 일반시민들의 지지를 잃고,
결국 민중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정책과 공약으로 당선되는 정치인들은 사라지며,
종국엔 개인적 인기와 사병들을 기반으로 자의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군벌들의 탈법적이고 잔인한 통치가 횡행하게 된 암울한 시기였다.
로마의 초대황제 본인 역시 이 잔인한 군벌들 중에 한명이었으며,
그런만큼 그의 집권과정 역시 본질적으로 보면 잔인한 군벌과 별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은 안토니우스는 필요도 없는데 잔인함을 발휘하고,
옥타비안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정도?
(항상 절제한건 아니였지만...)
물론 이러한 과오는 시대의 한계나 집권 이후의 성과로 정당화 될수는 있겠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선한자 없는 피카레스크 물의 주인공이지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라는 뜻.
댓글(1)
거의 야만인이었구만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