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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 24/07/27 18:29 | 추천 47 | 조회 10

유게에 올라오는 역사글이 신빙성이 없다길래 올리는 +10 [21]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70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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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음력 8월에서 12월 사이 부잔타이는 조선의 변경에 세거하던 여진 번호들을 대거 침탈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6진 역시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비변사가 파악하기로는 부잔타이의 해당 전략 양상은 6진의 조선군을 포위압박하여 그들이 번호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 사이 번호들을 침탈하려는 계획이었으며, 실제로 비변사의 판단은 부잔타이가 당시 보여준 전략과 일맥상통하였다.1 부잔타이는 육진 지역의 조선군 요새들에 대해 제대로 된 공격을 시도하기 보다는 압박전 정도만을 시행했고, 그와 동시에 번호들을 침략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아 작전을 벌였다.


울라의 대대적인 침입을 접한 조선으로서는 지금껏 상대해 본 적 없는, 번호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지닌 여진 세력이 변경에 침입한 상황을 맞이하여 방비책과 대처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로 인해 북방의 경계가 강화되었으며 적대 세력에 대한 정토가 의논되었다.


특히 이번에 등장한 적대세력에 대한 정토는 1603년 음력 9월, 즉슨 1603년 음력 8월의 종성, 동관 전투 이후에 최초로 의논되었다.2 그러나 여기서 의논된 것은 부잔타이의 울라 본세력에 대한 정토가 아니라 울라에 협조한 번호 세력인 풍계에 대한 정토였다. 조선군의 당시 원정역량과 재정상황, 그리고 울라가 보유한 힘을 생각해 보자면 울라 본토에 대한 정토시도는 한마디로 불가능했고, 정토라고 칭할 수도 없었다.


풍계에 대한 정토 논의는 음력 11월까지 진행되었으나, 음력 12월 무렵 부잔타이가 직접 대군을 몰고 번호들을 침탈하는 동시에 온성, 유원, 미전, 종성등의 조선 변경 지역을 침범하자 사실상 파기되었다. 조선은 음력 12월의 일로 당분간 수세에 몰렸고 정토 계획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다.


울라에 대한 반격 논의는 1604년 중순부터 다시금 언급되기 시작했다. 1604년 음력 7월 말~8월 초 무렵 함경감사 서성이 건퇴에 대한 정토를 통해 번호기강을 확립하고 울라에게 조선의 힘을 보이자고 주장한 것이다. 건퇴란 울라 본토와 조선 사이에 존재하는 울라의 중간기점이었다. 그만큼 방어력이나 주둔병력 자체는 울라 본토보다 훨씬 적었고, 거리도 울라 본토보다 훨씬 가까워 정토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울라에 대한 정토 논의가 1604년 중후엽부터 다시 의논되긴 했다고 하더라도, 조정의 주류는 해당 사안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조정에서는 서성의 의견에 대해 '건퇴를 공격하는 것은 사단만을 야기할 뿐임으로 쓸 데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영의정 윤승훈은 이에 대해 대놓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윤승훈은 건퇴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그 작전이 성공적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며, 특히 야전에서 싸울 시 일이 매우 어려워 질 것이라고 보았다.3이러한 신중론 때문에 1604년 무렵에는 건퇴 정토에 대한 조선의 움직임이 의논 그 이상선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조선이 북방 경계의 강화 및 정토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동안 부잔타이는 자신이 1603년의 공격을 통해 포로로 잡은 조선인 포로들 일부를 쇄환했다. 그는 포로들을 쇄환함과 더불어 조선 조정에 '조선의 직첩을 받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4 


부잔타이가 직첩을 받고자 한 것은 그 직첩을 매개로 조선으로부터 녹봉 명목의 물자를 받고 교역을 하여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울라는 명과 직접적으로 교역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중개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교역로 구축은 부잔타이에게 있어 물자를 충당할 가장 유효한 방책중 하나였다. 부잔타이는 1603년의 전투로 말미암아 자신의 무력을 조선에 충분히 보였다 생각하고 이 시점에 포로들을 쇄환하여 자신의 변경무력우위를 기반으로 한 교역로 구축을 시도한 것이다. 


교역로 구축의 목적으로 자신의 세력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기 위함만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05년 무렵 영의정 유영경은 부잔타이가 직첩을 받고자 함은 자신이 얻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을 번호들에게 재분배하여 자신의 영향력 하에 묶어두기 위함이라고 추정했다.5 비록 유영경은 직첩에 집중하여 중요한 부분을 놓쳤으나 그의 추정은 반쯤은 들어맞는다. 당시 부잔타이는 직첩을 번호들에게 분급하기보다는 녹봉을 수령한 뒤 그 녹봉의 일부를 속하 여진 부족들에게 분배하여 그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했다고 보여진다.6



부잔타이가 이렇게 직첩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부잔타이의 직첩 요구에 대해 마땅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1604년 무렵 조선 조정은 울라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에 집중했다. 비록 1603년 음력 8~12월에 울라의 침투에 변경지역이 크게 흔들리긴 했으나 조선의 관할하 요새는 모두 지켜냈기 때문에 형세상 아주 크게 압도당하고 있진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605년부터 반전되기 시작했다.


건퇴에 대한 정토 논의가 단순 논의선에서 그치고 있을 무렵인 1605년 음력 3월, 부잔타이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조선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이번의 부잔타이의 목표는 이전 1603년 음력 8월 당시에도 이미 공격대상이었던 동관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부잔타이의 동관 공격목적은 이전과는 달랐다. 1603년 음력 8월, 12월에 시행되었던 조선에 대한 공격이 번호를 흡수하는 동안 병행되는 단순 압박 수준이었다면, 이 시기 부잔타이는 동관을 확실하게 함락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아마도 조선이 자신의 직첩요구에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더욱 강력한 무력행동을 통해 조선을 압박,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고자 함으로 보인다.


부잔타이는 이 무렵 조선의 관측기록 기준 8~9천에 달하는 병력을 직접 통솔하여 동관으로 진격했다.7당시 동관의 지휘관이었던 동관첨사 전백옥은 이 사실을 번호의 진고를 통해 미리 파악하여 대비를 했으나, 당시 동관에 있던 조선의 전력은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고작 수백여명 선이어서 숫적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다. 8비록 여기에 일부 여진 번호들이 참전하여 조선을 돕긴 했으나 그렇다 해도 전력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동관 전투에 관한 기록은 각각의 기록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기록마다 존재하는 차이를 보다 신빙성 있는 사료를 택하여 재구성한다면 아래와 같은 전개가 이어진다.


1605년 음력 3월 15일 동이 트기 전 울라군은 동관진 인근에 이르러 성을 포위하였고, 먼 동이 틀 무렵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은 전력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동안 방어전을 펼쳤으나 북문을 지키던 양충상이 전사하면서 북문의 방위병력이 사실상 와해되었다. 성의 북쪽이 돌파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방어이점을 살릴 수 없던 전백옥과 그 휘하는 서문에 모여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는데, 그로 인해 동쪽과 남쪽 역시 돌파당했다. 그 이후 조선군은 분투하다 전멸당했고, 조선에 협조적이던 번호들 역시 다수가 죽었다. 전백옥 역시도 전사했다.9생존 군병은 조선측에 서서 참전한 번호들까지 합하여 겨우 30여명이었으며 민간인은 10여명만이 남았다.10


동관의 함락은 조선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울라가 조선에 대한 공격을 주목적으로 나서자 하루만에 동관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곧 자칫하면 북방이 돌파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으로 와닿았다. 그리고 이것은 울라에 대한 반격을 재논의하는 단초가 되었다.



동관이 함락당하고 첨사 이하 주둔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은 조선 조정이 울라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1603년에 있었던 울라의 침입에서는 비록 울라의 주요목표가 아니었던 탓은 있으나 최소한 조선 관하의 6진의 진보들은 모두 사수되었다. 그렇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논의 그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라가 대놓고 조선을 주요목표로 삼아 치고 들어왔고, 그 결과로 실제로 동관이 함락되었기에 사태가 훨씬 심각해졌다. 조선으로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북방경계가 무너지고 번호들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상실할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반격을 진지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져 감정적인 의논을 할 법함에도, 조선측에서는 무리한 의논을 하지않았다. 조선 조정은 본인들의 북방동원역량과 원정역량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울라 본세력과 충돌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역량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로서 비변사에서는 이때의 공격목표를 어디까지나 울라의 중간거점인 건퇴로 놓고 논의를 진행했다.


건퇴는 울라가 번호 흡수를 위한 중간 거점으로 종성 건너편, 즉슨 조선의 국경 밖에 건설한 요새였으며 1604년에도 정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위에 언급했듯이 논의 그 이상의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관이 함락된 뒤 함경도 관찰사 서성이 건퇴에 대한 정토를 건의하였고 비변사에서는 '정토 자체는 반드시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11


하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서성과 북병사 김종득을 비롯한 함경도의 행정관 및 변장들은 정토를 되도록이면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비변사 쪽에서는 충분한 준비 끝에 가을쯤 정토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함경도 쪽에서는 번호 추장 탁두의 진고를 바탕으로 건퇴의 울라군의 방비가 무척 약한 수준이라 판단하여 지금이 공격의 적기라고 판단하고, 비변사 쪽에서는 탁두의 진고의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고 탁두가 배신할 지 안할지도 불확실하며 건퇴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원정이니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탓이다.12


당시 탁두의 진고에 의하면 건퇴에는 약 5백여명의 울라군만이 주둔하고 있었다.13함경도측으로서는 해당 정보가 사실이라면 현재 함경도에 배치된 병력만으로도 정토가 충분하며, 반면 시간을 끌면 울라군이 건퇴에 충원되어 정토를 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반면 비변사에서는 자칫 잘못하다가 작전이 실패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내외적 손실을 입을 수 있었기에 신중을 기하여 충분한 병력을 준비한 후 정토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함경도측과 비변사측의 의견이 갈리자 선조는 우선 함경도측이 정토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되 철저히 준비하여 만전을 이행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었다.14


이로부터 얼마 뒤인 음력 4월 16일 무렵, 김종득의 정토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해당 정토는 건퇴에 대한 직접적인 정토는 아니었으며 울라군의 침입 당시 울라군에 협조한 번호 부락인 '이항'과 '우허'에 대한 정토였다. 조선군은 해당 정토에서 80여급의 수급을 얻었다.15이 정토는 건퇴에 대한 공격에 앞서서 조선군을 방해할 만한 요소들을 미리 정리한 것이었다. 


비변사에서는 이 보고에 대해 접한 뒤 김종득의 행동을 위와 같이 평가하며 건퇴를 정토하기 전에 필시 그들의 우방 번호들부터 처단해야 된다고 의견을 올렸다. 김종득 역시 이후 재차 서신을 보내면서 우선 건퇴를 공략하기에 앞서 울라의 우익이 되어버린 경원의 번호들부터 정리하고 건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내었는데 비변사의 의견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16


위와 같은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어야 했지만, 상황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음력 4월 15일경 건퇴에 주둔하던 울라군이 먼저 행동에 나서서 번호 부락인 벌이대와 독소를 공격한 것이다. 조선군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정했고, 그 결과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조선군 및 조선군과 함께 한 번호들은 해당 전투에서 6명의 울라군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나, 이미 벌이대와 독소는 공략당한 뒤였다. 해당 전투에 관한 보고는 음력 4월 25일에 한양에 올라왔다.17


또한 같은 날에 탁두의 또 다른 진고에 관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건퇴에 주둔한 적들이 조선과 번호에 대한 본격적인 재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의 수효가 최소한 아직까지는 450 정도라는 정보 역시 함께 보고되었다.18


벌이대 전투와 울라군의 재침 준비에 관한 정보는 함경도측이 건퇴에 대한 정토를 다시금 급하게 준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울라군이 지속적으로 변방을 침범하고 또 다시 번호들을 공략하는 상황에서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이 수효가 아직까진 그리 많지 않다는 정보가 일전의 탁두의 진고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수집되었기에, 서성과 김종득이 판단하기에는 확실히 지금이 적기였다. 그리하여 함경도 주둔 조선군은 신중론을 파기하고 더 이상 정토를 미루지 않았다. 음력 4월 28일 건퇴에 대한 정토의 향후 진퇴 여부에 대해 상황을 살피며 적절히 치계하겠다는 서성의 서신이 한양에 올라왔고, 그로서 건퇴 정토는 초읽기에 들어갔다.19


1605년 음력 5월 4일, 북병사 김종득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는 3천여명의 조선군이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정했다. 여기에는 번호 추장 탁두가 이끄는 3백여명의 번호군도 함께 종군하였다. 총원은 3천 3백여명으로서 지금까지 조선에 전해진 건퇴 주둔 울라군의 수효에 관한 정보들을 종합해 살펴보자면20 건퇴를 정토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숫자였다.


3천 3백여명의 조선, 번호군은 음력 5일 무렵 비가 온 통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6일 도강을 하였다. 이 이후 조선군의 본래 계획은 풍계 부락을 거쳐 진군하여 인근 노동이라는 지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대기한 뒤, 7일 새벽녘에 건퇴로 진군하여 동틀녘 건퇴의 삼면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삼면 공격은 일부러 울라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척 하다가 탁두의 기병대를 이용해 그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섬멸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울라군이 이 계획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건퇴를 사수하고자 하면 막강한 화기전력을 바탕으로 건퇴를 공성하여 함락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 향도인 번호들이 풍계로를 따라 이동하면 적의 매복에 걸릴 수 다는 의견을 내었다. 풍계를 경유하는 길 자체가 워낙에 잘 알려진 길이다보니 매복의 가능성 자체는 타당했고, 그에 따라 번호들이 제시한 대안인 산골 우회로로 진군로를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첫째로, 해당 우회로를 통한 건퇴 진군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해당 진군로에는 수원(水原)이 없어 식수를 보급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행군이었다면 쉬엄쉬엄 진군할 수 있었겠으나 애초에 조선군의 전략 자체가 건퇴에 대한 기습공격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조선군은 날이 밝기 전 최대한 빠르게 진군해야했고, 그 탓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상태로 강행군을 하다보니 건퇴 인근에 도달했을 때에는 모든 병사들이 갈증과 피곤함에 지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건퇴 근처에 이른 조선군과 번호군은 건퇴의 상황을 살펴보다가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이 요새에서 나와 싸울 기미가 없자 곧장 돌진하여 성 밖의 부락을 분탕하고 약탈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울라군이 노리던 상황이었다.21


울라군은 이미 조선군이 자신들에 대한 정토를 시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군의 정토가 준비되고 있던 것은 이미 음력 4월부터 공공연한 사실이었다.22그런 상황에서 건퇴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일한 판단이었다. 아마도 우회로를 이용해 진군하였기에 조선군이 그 가능성을 간과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울라군은 이미 우회로의 존재 역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선군의 선봉이 흩어져 약탈을 시작하자, 조선군 전열이 흩어지기를 노리면서 근처에 매복해 있던 울라군 기병대 수백여기가 조선군을 급습했다. 조선군과 조선군에 함께 종군하던 번호들은 그 급습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조선군은 울라군의 공격에 의해 전열이 붕괴되었고, 이어서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곧 몇 개의 부대로, 그 부대들은 또 다시 몇 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져 다급히 후퇴하였다.


울라군은 도망치는 조선군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곧 울라군은 우수한 기병전력을 이용하여 조선군을 추격섬멸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도주하다가 죽거나 저항하다가 죽는 이분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추격전은 건퇴로부터 약 2식정(60리) 밖에 해당하는 거리까지 진행되었으며, 조선군이 해당 거리를 도주하는 동안 벌어진 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최악의 상황에서 빛을 발한 것은 우후(虞候) 성우길의 분전이었다. 성우길은 병사들이 도륙당하는 와중 수십여명의 휘하 병사들을 규합하여 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울라군의 추격기세를 한꺼풀 꺾었다. 이후 성우길은 목숨을 다해 싸우면서 후퇴하는 아군의 뒤를 엄호했고, 그로서 조선군은 가까스로 출혈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까스로 퇴각에 성공한 정토군 본군은 음력 5월 8일 김종득의 지휘 아래에서 전열을 수습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군병이 퇴각 과정에서 산산히 흩어졌기 때문에, 본군이 복귀한 뒤에도 패잔병들이 며칠에 걸쳐서 귀환했다.23



건퇴 정토는 실패를 넘어서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조선군은 공격대상이었던 울라군의 최소 6배에서 최대 10배에 달하는 전력에 강력한 화기까지 다수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전략적 실책을 범하여 패전했다. 그들은 진군 도중에 체력을 너무 소진했고, 건퇴에 이르러서는 교전준비에 임하기 전에 분탕부터 진행했다. 그런 와중에 매복에 걸려 강력한 기병전력을 지닌 울라군에 의해 진형이 붕괴되어 전투의지를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수 시간에 걸쳐 도주하며 출혈을 강요당했다. 전투의 전개와 결과는 최악이라고 평가할 만 했다.


해당 전투에서 조선군은 50여급의 수급을 얻었다고 하지만24, 전투의 전개를 보건대 그 수급의 일정 숫자 이상은 울라군을 상대하여 얻은 것이기 보다는 건퇴 요새 근처의 마을을 공격하며 획득한 수급으로 판단된다. 반면 조선군은 확실히 파악된 정군 전사자만 213명이었으며, 그 외에 함께 종군한 화반, 복노, 잡수종인의 전사자는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만 이 정도이며 부상자는 그 몇 배가 넘고, 포로가 된 병사들도 다수가 존재했다.25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건퇴 공략이 참혹한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처음에는 건퇴 전투의 판단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웠다. 그것은 함경 감사 서성이 북병사 김종득의 보고를 기반으로 한 장계에서 건퇴 공격을 승리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서성의 보고의 내용은 건퇴 정토는 비록 건퇴 요새 자체에 대한 공략은 진행하지 못했으나 아군을 급습한 울라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적의 정예 절반 이상을 살상했으며, 아군의 전력을 보전하였으므로 승리에 가깝다는 논지였다. 다만 적에게 아군의 약점을 보인 것이 안타까우며, 진군로를 바꾼 탓에 건퇴에 대한 공략 자체는 시도하지 못해 향후가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26


서성의 보고는 전체적으로 '큰 득을 보진 못했고 아쉬운 점도 많으나 적은 격퇴하였으며 아군의 전력 역시 온전한 전투'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런 탓에 비변사에서도 해당 전투의 문제점과 향후 사세를 지적할 뿐 확실하게 승리 혹은 패배라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27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함경도 안문 언사 이정험이 제대로 된 상황을 전달하기 시작하자 평가가 달라졌다. 이정험의 최초 보고는 서성의 보고가 조정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1605년 음력 5월 22일에 조정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이번의 건퇴 공략 시도가 울라군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참혹한 패전으로 끝났으며 그 이후 아군이 지리멸렬 퇴각했고, 가까스로 성우길의 분전 덕에 전멸 당하진 않았다는 보고였다. 사상자 역시 상당하다는 내용 역시 보고에 끼어 있었다.28


이정험의 보고가 도착한 뒤 조정을 구성하는 대신이며 관원 다수는 건퇴 전투에 대해 확실한 패배라는 인식을 가졌다.29 그나마 얼마간은 '서성과 이정험의 견해가 다르니 판단을 유보하고 상황을 자세히 살피자'는 의견도 나왔으나30이후 지속적인 후속 보고들이 도착함에 따라 패배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사태가 예상보다 심각한 것이 파악되었다. 음력 7월 무렵 선조는 건퇴 전투에 대한 패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31패전 책임자였던 서성과 김종득은 각각 파직과 나국의 처벌을 받았다.


건퇴 공략의 패전으로 인해 조선은 사실상 울라에 대한 선제타격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두만강 지역에 대한 군사적 우위 역시 상실했다. 조선은 건퇴에 대한 정토를 다시는 시행하지 못했고, 군사적으로 수비 전략을 강화함으로서 전략노선을 전환했다.



한편 건퇴 전투 직후 무렵, 부잔타이는 조선을 압박하여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달성코자 했다. 그가 원하는 바란 바로 조선과 강화협약을 맺고 직첩을 얻어내어 조선으로부터 녹봉을 받는 동시에 교역을 진행하여 물자를 충당하는 계획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설명했다시피 부잔타이는 1603년 음력 8월~12월의 전투 이후부터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얻고자 했다. 당장 건퇴 전투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던 1605년 음력 3월의 동관 전투 역시도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직첩을 얻고자 한 심산이 강하게 반영된 행동이었다. 


부잔타이의 요구는 음력 5월 건퇴 전투 직후부터 조선에 다시 전해지기 시작했다.32 그러나 이 시기의 부잔타이의 직첩 요구가 건퇴전투의 승전 결과를 반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시기상으로 볼때 부잔타이의 직첩요구는 최소 음력 5월 15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건퇴 전투는 음력 5월 7일에 발생하였으므로 부잔타이가 건퇴 전투의 결과를 자신의 '음력 5월 직첩 요구'에 반영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마도 이 때의 직첩요구는 당해 음력 3월 벌어진 동관 전투의 결과만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 부잔타이는 자신이 붙잡은 포로들을 매개로 직첩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협상 시도는 이미 1604년에도 한 차례 시도했던 전적이 있었으며, 또 1606년에 직첩을 받으면서 실제로 포로들을 송환하였으므로 그 가능성이 타당하다. 또한 조선이 요동에 보낸 자문에도 부잔타이가 포로 송환을 매개로 직첩을 요구한 정황이 보이기에 합당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33


부잔타이의 첫 번째 서신이 조정에 전달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퇴 전투의 결과가 조정에 도착했다. 조선 조정측에서는 부잔타이의 요구가 마뜩치 않았으나 건퇴 전투의 결과 탓에 부잔타이에게 직첩을 수여함으로서 울라와의 강화를 진척시켜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로서 부잔타이에게 첨지중추부사(정 3품)의 직에 상응하는 직첩을 내리고자 했다.34


부잔타이에 대한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은 음력 7월중에 북병사 김종득에 의해 부잔타이에게 전해졌다.35그러나 부잔타이는 자신 몫의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에 만족치 않고 추가적인 직첩을 100장 요구했다. 그것은 자신의 휘하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명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애초에 부잔타이가 직첩을 요구하는 주요 목적중 하나는 직첩에 수반하는 녹봉이었다. 그런데 부잔타이가 고작해야 강화의 증표 역할을 하는 직첩 하나로 만족할 리가 만무했다. 부잔타이는 조선에 보다 확실한 대가를 원하고 있었다.


부잔타이의 두 번째 직접적 직첩 요구는 음력 7월, 즉슨 본인에 대한 직첩 수여와 비슷한 시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 부잔타이는 자신의 수하 '자을고사'를 시켜 직첩을 구두로 요구하는 한 편36, 자을고사를 통해 자신의 압박에 굴복한 번호 추장 탁두37로 하여금 조선에 직첩을 요구하는 서한을 그와 함께 전달하게 했다. 이 때 탁두 휘하의 보을지와 동관에서 울라의 포로가 된 이부기가 함께 움직여 부잔타이의 서신을 전했다.38해당 직첩 요구는 음력 5월에 있었던 1차 직첩 요구에 이어 두 번째로 확인되는 1605년의 직첩 요구였다. 이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부잔타이가 100여장의 직첩을 요구한 사안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건대 탁두가 전한 서신에 '100여장의 직첩 요구'가 쓰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잔타이가 100여장에 달하는 직첩을 요구한 것은 건퇴 전투의 승전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였다. 건퇴 전투 자체가 야전을 통한 울라군의 압승이었으므로 부잔타이는 이를 통해 자신의 무력 우위가 관철되었다고 판단하여 이전보다 더욱 커진 요구를 한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부잔타이의 엄청난 수의 직첩 요구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혹자는 추가적인 직첩을 발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으며 혹자는 직첩을 발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선조는 직첩의 추가 발급 문제에 대해 '아침에 허락치 않으면 저녁에 쳐들어 올 것이니 이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논지의 발언을 하며 직첩의 발급을 사실상 허가했다.39 이는 선조의 발언에서 보이듯 조선이 울라의 군사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직첩의 추가 발급을 허용한 것이었으나, 선조는 이에 대해 '금수를 기르는 것은 제왕의 도이고 오는 자를 위무하는 것은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량이다.'라고 말하며 입장을 윤색했다.


조선 조정에서 추가로 발급하는 직첩은 모두 정 3품 절충장군에 해당하는 직첩이었다.40본래 부잔타이에게 지급된 직첩은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으로서 절충장군과 동급이었기에, 조정에서는 부잔타이에게 지급하는 직첩을 한 단계 올려 가선대부의 직첩을 함께 내리기로 했다. 해당 직첩의 지급 방식에 관하여서는 본래 조금씩 분급하면서 울라측이 조선의 의도에 따르게 하고자 하는 전략을 시행하기로 했으나, 한꺼번에 지급하는 방안 역시도 제시되었다.41


또한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직첩 지급에 번호 규례를 적용하였다. 1605년 음력 11월 신임 북병사 이시언은 종성부사 유비에게 울라측 사신들에게 번호 규례에 따라 녹봉과 의건을 결정한다고 전하게 했으며42, 이듬해 5월에는 '그들이 이미 직첩을 받았으니 구호와 같다'는 발언이 비변사에 의해 나왔다.43이는 조선이 울라와 실질적으로는 강화, 화친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울라간 관계를 인위적으로 윤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장정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로는 힘에 밀린 화친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번호에게 사용해온 규례를 훌룬(울라)과의 관계에 적용하여 이를 정당화했다.'.44


한편 100여장의 직첩 발급이 결정됨에 따라 직첩에 상응하여 지급되는 녹봉의 양 역시도 논의되었다. 본래 정 3품 당상관으로서 절충장군과 동급인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에 수반되는 녹봉의 양은 면포 40필이었다.45그러나 국가의 재정상황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과 울라는 양자간 협상에 따라 녹봉의 양을 재조정했다. 


울라의 경우 부잔타이 몫의 직첩 50장에 각 40필의 면포를, 그리고 그 휘하 장수들에게 분급될 예정인 직첩 50장에 각 20필의 면포를 적용하여 총 3000필의 면포를 요구했다. 조선측은 이를 재조정하여 '왜란 이후 번호에게는 직첩당 20필을 지급키로 했다'는 논리를 내세워 일괄적으로 모든 직첩에 20필을 적용, 총 2천필을 녹봉으로 지급코자 했다. 


양자간 의견충돌 과정에서 직첩의 지급을 맡은 조선측 실무담당자 뿅뿅신이 이번 녹봉지급이 부잔타이의 향후 태도를 결정지을 중대한 사안이라고 지적하였고, 북병사 이시언과 함경감사 이시발 역시 뿅뿅신의 논조에 동조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비변사 역시도 이에 동의했다. 비변사는 20동(1천필)의 면포를 가지고 욕심이 한정없는 도적들과 따질 수는 없다면서 부잔타이의 요구대로 3천필의 면포를 지급키로 하였으며, 대신 부잔타이는 직첩에 상응하는 포로들을 송환했다.46


그것으로 조선과 울라간의 강화협약과 번호규례에 기반한 교역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는 조선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해 관철된 협약이었으나 조선은 이를 기미책으로 포장하여 체면치레를 하였고, 부잔타이의 경우 외양상으로 조선에 '번호 취급'을 받는 꼴이 되어 승리를 하고서도 을의 위치처럼 보이는 외교 형태를 구축하게 되었으나 그의 목적인 '강화'와 '교역'은 모두 성립되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이 울라의 직첩 요구를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인 이유는 동관의 패전과 뒤이은 건퇴의 패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울라가 명나라와 번신관계를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은 누르하치가 1600년 무렵 본인들에게 직첩을 요구했을 때에는 누르하치가 명으로부터 이미 용호장군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들어 직첩 요구를 거부했다. 이미 명의 번신인 누르하치에게 조선이 자구적으로 직첩을 지급하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명으로부터 외교적 시비를 걸릴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라는 명과 어떤 번신관계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직첩 지급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조선은 이렇게 울라와의 전쟁을 시작점으로 하여 그들과 협상을 진행하고 1606년부터 본격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울라 자체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1613년 울라를 병합한 것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1.『선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3일

2.선조실록』선조 36년 음력 9월 7일

3.선조실록』선조 37년 음력 8월 8일

4.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1, 2019, pp.70~71

5.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9일

6.『구만주당』 신해년 음력 12월 기사

7.그러나 실제로 이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진 않았을 것이다.상대편의 관측기록은 불확실한 정황이 많다.

8.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12일. 해당 기록에는 동관에 있던 남녀노소가 27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이 군병을 제외하고 민간인만 계산한 것인지 모두를 합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민간인만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크다.

9.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8일, 4월 12일, 4월 16일, 4월 29일

10.이는 포로로 끌려간 군병과 민간인을 제외한 숫자이다.

11.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3일

12.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6일

13.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8일

14.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6일

15.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16일, 음력 5월 8일

16.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21일

17.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25일

18.선조실록』선조 38년 위와 같음

19.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28일

20.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8일, 4월 16일, 4월 25일등

21.이상 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19일, 음력 6월 12일

22.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4월 19일

23.이상 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6월 12일

24.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25.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7월 5일, 부상자의 경우에는 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8일의 수효를 참고.

26.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19일

27.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0일

28.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29.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26일, 28일

30.선조실록』선조 28년 음력 5월 28일, 29일

31.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7월 6일

32.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5월 15일, 29일에 부잔타이가 보내온 서신과 그가 요구한 직첩에 관한 의논이 나온다.

33.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對女眞)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조선시대사학회, 2013, p.194.

34.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35.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11월 17일. 실제 수여는 음력 7월중에 있었으나 음력 11월 17일 기사에 기록된 이유는 당시 북병사 이시언이 포로 쇄환과 직첩의 추가 지급에 관한 건을 보고하면서 당시의 개유절목을 함께 올린 것이다.

36.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7월 5일

37.그는 건퇴 전투에서 조선군 편에 서서 종군하기도 했다.

38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7월 7일

39.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40.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기사3

41.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26일, 29일

42.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11월 17일

43.선조실록』선조 39년 음력 5월 9일

44.장정수,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명청사연구』 54, 명청사학회, 2020, p.191.

45.선조실록』선조 38년 음력 10월 26일

46.선조실록』선조 39년 음력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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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료와 논문, 서적 출전 밝혀서 역사글을 올리는데 아무도 안 읽어서 요즘엔 커뮤입맛에 맞게 짤이랑 대사 조합해서 올리는데 인기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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