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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여친인줄 알고 회사 75C 경리 백허그 한 썰.txt +6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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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인줄 알고 회사 75C 경리 백허그 한 썰.txt

1부: 분홍빛 착각


오후 5시의 햇살이 탕비실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김 대리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사내 연애 중인 여자친구 ‘미영’ 때문이었다.
복도 끝 정수기 앞,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갈색 긴 생머리, 그리고 그녀가 즐겨 입는 베이지색 오버핏 가디건. 무엇보다 저 가디건 위로도 숨길 수 없는, 김 대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완벽한 곡선. 동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설의 75C’라 불리며 뭇 남성들의 시선을 훔치던 그 실루엣이 분명했다.
‘요 녀석, 여기서 혼자 커피를 타고 있네.’
김 대리는 톰과 제리의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쿵광거렸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회의에 들어갔거나 외근 중이었다. 이 완벽한 타이밍, 이 짜릿한 스릴. 그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은은하게 풍기는 라벤더 샴푸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잡았다, 요 놈!”
김 대리는 과감하게 양팔을 뻗어 그 포근한 등을 와락 껴안았다. 백허그. 드라마 남주인공이 된 것 같은 완벽한 각도였다.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그는 짐짓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 척하고 있어?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자기야?”
그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녀의 가슴께로 손을 살짝 올리려 했다. 로맨틱한 서프라이즈의 절정이었다.
그때였다.
품 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고개가 돌아갔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옆얼굴에는 굵직한 턱선이 돋보였고, 목울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김 대리님?”
그것은 미영의 하이톤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시베리아의 동굴에서 30년간 곰과 함께 묵언 수행을 하다가 갓 튀어나온 듯한, 지옥의 밑바닥을 긁는 듯한 중저음의 베이스였다.
그는 얼마 전 새로 입사했다던,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힙스터 스타일의 재무팀 신입 사원, 이철수였다.



2부: 시베리아의 바람


그 순간, 탕비실의 따스했던 햇살은 잿빛으로 퇴색되었다.
김 대리, 아니 인간 김민석은 자신의 양팔이 껴안고 있는 그 거대한 모순덩어리를 인지했다. 75C라고 믿었던 그 풍만함은 사실, 철수가 가디건 안주머니에 넣어둔 두툼한 대용량 보조배터리와 텀블러가 만들어낸 기만적인 굴곡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의 확신이란 얼마나 덧없고 우스꽝스러운가.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던 '지하 생활자'의 비참함이 바로 이런 것일까. 김민석은 자신의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남자의 단단한 흉근을 느끼며, 영혼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철수가, 아니 그 수염 거뭇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려 김민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그곳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당혹감 대신, 삶의 부조리를 묵묵히 견뎌내는 늙은 농노의 체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김 대리님...”
철수의 굵은 목소리가 공허한 탕비실의 공기를 갈랐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법입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있는 건 텀블러입니다. 당신이 찾던 온기는, 그리고 당신이 갈구하던 그 '형상'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민석은 황급히, 마치 불에 데인 듯이 팔을 풀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죄악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그의 손바닥에는 아직도 철수의 가디건이 주던 까끌까끌한 감촉과, 남자의 체취가 섞인 라벤더 향의 부조화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 아...”
김민석은 언어를 잃었다. 그는 단지 사랑을 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 사랑 대신 차가운 현실의 철퇴를, 그것도 텀블러를 가슴에 품은 남자의 등을 통해 내리꽂았다.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아니, 삶 자체가 거대한 농담이라는 체호프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철수는 흐트러진 가디건을 무심하게 여미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용서의 미소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을 꿰뚫어 보는 성자의 미소에 가까웠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말이 있죠. ‘믿어라, 하지만 검증하라.’ 대리님은 검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가는 참혹한 수치심뿐이죠.”
철수는 묵묵히 자신의 텀블러를 꺼내 들고 탕비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광활한 설원을 홀로 걷는 유배자처럼 고독해 보였다.
홀로 남겨진 김민석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하늘은 어느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처럼 우중충하게 흐려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뼈마디를 시리게 했다.
‘나는 무엇을 안았던 것인가. 나는 누구를 사랑했던 것인가.’
그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그 손은 연인의 따스함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남자의 등 근육과 보조배터리의 딱딱한 감촉만이, 영원히 씻겨나가지 않을 원죄처럼 남아 그를 괴롭힐 것이다.
김민석은 고개를 떨구었다. 인생은 고통이다. 그리고 가끔은, 남자 경리 직원의 등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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