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5월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 집을 하나 구한 뒤
자신이 아는 예술가들에게 편지를 돌리기 시작한다.
(맨 앞에 보이는 작은 집이 고흐가 있던 옐로 하우스)
편지 내용은
"난 이제 동생 테오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니 이걸 생활비삼아 나와 같이 그림그리며 살 화가를 모집합니다"
였는데, 편지를 받은 화가들은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도 고갱의 급발진과 파탄난 성격은
동료 예술가 사이에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딱 한사람. 폴 고갱 빼고.
폴 고갱은 반 고흐처럼 제법 늦은 나이에 발을 들인 화가였는데,
직장을 다니며 겸직화가로 살다, 실직과 생활고로 남은 가족을 코펜하겐의 처가에 맡긴 뒤
프랑스로 건너와 성공을 목표로 아득바득 살고있었다.
평소에 고갱의 성공담과 생활력을 동경하던 고흐는
그와 함께 한평생 작업하고, 더 나아가 옐로 하우스를 예술가들의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으나
'돌았냐 내가 너랑 오순도순 오래 살게'
하지만 고갱 또한 고흐의 발작과 심각한 조울증을 잘 알고있었기에
집세라도 굳는 고흐 집으로 들어간 뒤
자신의 꿈인 탈 유럽을 위한 종자돈을 모아 튈 계획이었다.
(둘이 동거할 적 서로에게 준 자화상들)
미술중개상인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그림을 공급하는 조건,
그러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갤러리 전속작가 계약으로 성사된 둘의 동거는
시작부터 조금씩 꼬이기 시작하는데
고갱의 작품은 테오가 넘기는 족족 잘 팔리며
파리까지 넘어가 호평이었던 반면
"고흐흐흐흑"
고흐의 그림들은 호평은 커녕 잘 팔리지도 않았다.
이런 격차는 고갱의 탈출각을 빠르게 잡게 만들었고
고흐의 정신병은 더 빠르게 악화됐다.
그리고 치명적으로 성격과 생활방식, 작품의 견해차이가 너무나 달랐다.
어느날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보고
"야 이 씨1빨럼아!!!"
(왜 그래 친구? 무슨일이야?)
"이 새1끼야 왜 갑자기 멀쩡한 컵은 던져깨고 지1랄인데?"
내 얼굴을 왜 이따구로 그린거야!
너 지금 날 흐리멍텅한 분조장 알중새1끼라고 비꼬는거지?!!
"고흐흑! 아무도 이세상에서 날 사랑해주지 않아!!"
"고흑! 고흐흐흑!!!"
'좇같은놈....'
고갱은 고흐가 활화산같이 발작하고, 도발을 걸고, 공동체의 지출을 낭비하며 괴롭게 만들었다 했으며
고흐는 그의 작풍을 처음엔 싫어해도 존중이라도 해줬지만, 나중엔 대놓고 고까워했다.
그렇게 그 둘은 동거하는 사이 숨쉬듯이 언쟁과 아슬아슬한 쌈박질 직전의 냉전을 유지했다.
그리고 고갱 또한 그리 심약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공동체는 허구헌날 죽어라 싸우기 바빴다.
그리고 격렬한 논쟁이 있던 어느날, 고흐는 화를 참지 못해
면도칼을 들고 고갱의 뒤를 조용히 응시하다 사라졌고
"그래 족까라 내 목숨이 중요하지 이딴 단칸방 방세가 중요하냐 꺼져줄게!"
더 이상 못참는데다 누칼협까지 당해버린 고갱은
9주만에 옐로 하우스를 나가는 것으로 동거가 끝난다.
결말은 알다시피, 고흐는 그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요양원과 작업실을 전전하다 권총 자1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일로 고흐의 후원자이자 동생이었던 테오도 정신병을 얻고 1년만에 형을 따라간다.
그럼 고갱은 어떻게 됐는가
고갱: 얀녕하세요 원주민 여러분. 유럽파 화가가 왔어요
자신이 탈유럽을 해야 진정한 각성을 이루겠다고 느낀 고갱은
고흐가 자1살한지 얼마 안 된 시점에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라는 섬으로 가
순수한 원주민들과의 교감을 꿈꿨으나
원주민들: ? 근데 뭐요
고갱: ?
폴리네시아는 프랑스령이 된지 좀 된 터라
이미 원주민들은 속세와 문명, 프랑스어에 익숙해져
고갱이 처음 왔을땐 그냥 코쟁이 +1 정도의 감정밖에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끝
댓글(4)
이번 고흐전 보고와서 느낀게 있지
진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그림은 맞는데
솔직히 집에 걸 그림으로 사라면
좀 그런데 싶었다
안팔린 이유가 있어
그래도 고갱은 해피엔딩인강?!
사실 고갱도 폴리네시아에서 건너간 뒤 확 바뀐 화평이 후대엔 재평가를 받았지만 그때는 별 호응을 못받아서 고생하다 감
고갱 로다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