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들
우리나라에 최초로 영화를 들여온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홈즈씨다.
셜록 홈즈냐고?
여행가겸 사진작가겸 영화제작자인 버튼 홈즈씨는
1901년 당시 고종 황제에게 영화 정확히는 당시 명칭인 활동사진을 소개했다.
뮤토스코프와 키노라 2종류를 소개했는데
키노라
두개 다 크랭크 축을 돌리면 사진집이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원시적인 -1인용- 영화장치다.
또한 최초로 한국에서 영화-활동사진-를 촬영한 사람이다.
최초로 상영된 영화와 최초로 촬영된 영화의 소개를 마쳤으니
이제 최초로 상업적 영화를 상영한 곳을 말하겠다.
최초로 상업적 영화를 상영한 곳은 어디냐고?
바로 동대문 활동사진소다.
1903년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주최한
동대문 기계창고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고 크게 흥행했다.
전차표 수익을 위한 홍보 영화였으면서
한국 영화사의 효시가 된 이 영화 상영은
당시 큰 충격을 주었는데 신문기사까지 나왔다.
"전차를 타고 온 관객들로 상영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매일 밤 입장수익이 백여원에 달했으며 덩달아 전차표 수익도 올랐다"
1903년 7월 10일자 [황성신문]
딱봐도 바글바글 하지 않나?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1부 해방전 조선 영화계: 기원과 영화관 그리고 변사
영화 타잔 중에서
환등기 개화기 이전 에도시대에 들어온 이 환등기는
일본식 조어 영상의 기원이 되었다.
지금은 영상하면 동영상(움직이는 영상)을 대체했지만
원래는 상이 비친 이미지를 뜻했다.
해방전 조선 영화는 당시 인기였던 수입한 서구 활극 영화와
기술을 배워오던 일본 문법과 스케일의 조합이었다.
당시 문화 예술인과 엘리트들의 영화계 참여는 활발했는데
어느 예술보다 대중적 파급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예술성을 반영할 수 있는 매체 본연의 힘과
최첨단 근대예술인 영화예술계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자부심
어느 예술보다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등등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영화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선발되어야 했던 것이 존재했는데
그 문제란 바로 조선에는 극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궁중의 희대
민중의 연희
이에 옥내 극장이 들어서는데
이는 공동체의 결속과 위안을 주던 연희가 완전히 자본주의 소비상품으로 전황되는 것이었다.
최초의 연예기획사 협률사(1902~1904)
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1910 설립)
활동사진의 최초 문헌자료
<황성신문> 1901년 9월 14일자 논설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발견된 최초 문헌 자료이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 동화)’이라 할 만하다. …
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진실로 바라는 것은 백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
첫 활동사진의 민간 공개
1903년 6월23일 『황성신문』
위 링크의 한성전기 주식회사에서 상영한 활동사진에 대한 기록이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생한(生命) 도시, 각종 극적인
장면(劇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
상영: 요시자와 상점(1897년 경 설립)
이 동대문활동사진소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 차고 안에 설치한 가설무대가 그 전신
1907년 6월 흥행단체인 광무대가 인수 ‘광무대’ 이름으로 운영
1908년 박승필이 광무대를 임대하여 광무대가 연희극장으로 사용되기 시작
- 전통 연희극장으로 변모(판소리와 창극 보호)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광무대는 일본와사전기회사의 소유로 귀속
1913년 일본와사전기회사 사업확장으로 폐관
1913년 일본인 소유 극장 연기관을 임대하여 다시 광무대라 칭하고 공연을 재개
1910년 시대추세에 따라 활동사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단성사를 인수 영화관으로 개관
192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파극이나 신극단체에도 대관 - 1925년 토월회와 전용대여
1930년 방화사건으로 전소
-현대의 파테 로고-
아스터 하우스: 조선에 들어온 파테 영화
1907년 아스터 하우스(프랑스인 마탱이 운영)
아스터 하우스에서는 1년간 매일 저녁 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그 영화들은 프랑스 파테사에서 제작되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 활동사진을 상영
상술했던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이 만든 희대 ‘협률사‘
- 국악예술 공연 중심이었고
이후 경성 극장가 형성 구도는 위 짤과 같은데
민족별 이용객을 나눠서 극장이 형성되었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은 경성 고등 연예관으로 1910년 설립되었는데
규모: 2층 목조 건물. 600여 명
영화 수입: 프랑스 파테영화사
요금: 특등선 1원, 일등석 50전,
이등석 30전, 삼등석 20전,
사등석 10전
단체관람 할인
- 자본주의 영화 유입현상 확대
- 시설의 고급화와 대형화
조선인 전용 3대 활동사진관은 안타깝게도 일본인 흥행사가 주도했어
우미관(1910)
일본인 동업으로 설관하였으며
1910년 경성 고등 연예관으로 설립되어
1915년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어
개관 당시에는 일본 직수입 형태를 띄었으며
15년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였고
16년 일본 하리마 유니버설과 계약을 맺어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흥행하였고
1928년 국내 최초로 토키영화(유성영화)를 상영했었지
단성사(1907)
대한민곡 최초의 본격 상설 영화관
1907년 종로 3가에 목조 2층 건물인 연예 단성사로 개관
1918년 광무대의 운영자이자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인 박승필(1875~1932)이 인수하였고
최초 상설 영화관으로 변모하게 되었어
일류 변사와 전속 관현악단을 기용하였지
1919년 10월 27일 최초로 국내 자본으로 의리적 구토(감독 김도산)을 상영하였고
(이에 10월 27일은 한국 영화의 날로 지정됨)
자체 제작, 상영 배급을 하였고
덴카쓰, 쇼치쿠, 유니버설에서 필름을 공급했으며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등 무성영화의 주옥과 같은 작품을 상영했다.
장화홍련전(1924)같은 조선인들이 만든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새로운 문화매체로서의 역할인 다양한 공연의 무대를 재공했다.
아리랑(1926)상영으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냈으며
2년 연속 상영이라는 대기록과 흥행으로
명실 상부 최고의 상설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돼
아리랑 中에서
<나운규 (1902~1937) 감독, 각본, 주연>
<1945년, 8.15 해방 뒤에도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전국을 돌며 상영되어 서울에서만 9번이나 개봉되었고,
1952년 9월 <영남일보> 광고에 따르면 만경관에서도 1주간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에 영화 필름이 소실되었고 일본에만 남아있다는 소문만이 남았다.>
1926년 ‘대륙극장으로 개칭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을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연혁은 다음과 같아
2001년 구 건물이 철거됨.
2005년 지하 4층, 지상 9층-7개관의 멀티플렉스 재개관
3개관을 추가하여 총 10관에 1,806석 규모 극장.
2008년 4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 단성사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 후 아산엠단성사로 출범.
2012년 법원, 경매 개시 결정.
2016년 단성골드빌딩으로 명칭 변경.
단성골드주얼리센터 오픈.
참으로 안타깝지만 역사는 자본의 논리에 무력해
조선극장(1922~1936)
위치는 종로구 인사동
연극 공연을 겸한 고급 영화 상설관을 표방하였으며
제일 늦은 만큼 최신식 극장이었대
한국 연극사의 한 획을 그은 토월회를 기반으로 진행하였으며
(1922년 토월회 창립 공연)
1930년대 영화 상설 극장으로 전환하였으나 동양극장(1935)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1936년 방화로 폐관되었어
무성영화시대의 목소리이자 최초의 연예인/ 당시 최고의 스타는 바로 변사라 하겠는데
당시 조선의 최고의 스타는 서상호 변사였어(1890~1938)
1920년 8월17일 조선일보
1920년 여름 조선일보 경북지국이 주최한 영화 상영회를 알린 사고(社告).
인기 변사 서상호의 사진을 싣고 그가 해설한다는 사실 강조했지
초기 영화 상영의 관행은 변사(辯士): 전설(前說)/해설(解說).이 있는데
최종적 창작자로 최초의 영화 스타이며 전통 연행의 유산이 되었지(1인 진행)
복합적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본편+단편들+막간 공연 등으로 5시간 정도 소요되었어
1920년대 무성영화 극장의 삼사로는
영화의 활동을 가능케 한 기사
관객과 대면하며 영화의 흥행을 좌우한 변사
음악으로 관람 분위기를 돋운 악사 등이 있어
<청춘의 십자로>(1934)
감독: 안종화(1902~1966)
<청춘의 십자로>(2008)
연출: 김태용
변사: 조희봉
누가 뭐라 하더라도 무성영화의 꽃은 변사였지
한국 영화 최후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 감독
마지막 변사 신출(1928~2015)의 연기
변사는 설명 변사와 연극 변사로 나뉘었는데
설명 변사는 상영시 자막을 읽어주거나 내용을 설명했으며
-조선 변사는 주로 설명 변사였다.-
연극 변사는 일본 영화 중심으로 목소리 연기를 했어
변사의 기원과 역할
변사의 기원은 (1896~1939)년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변사는 (1899~1940)년
"그저께 밤 오후 여덟시 중명전에서 활동사진을 열어 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태자비
그리고 영친왕 저하와 황귀비께서 관람에 임하셨는데 '전무과 기사 원희정' 씨의 설명으로
빙활(氷滑), 군함의 수병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 해수욕장의 광경 등
20여종을 모두 관람하셨는데 전쟁영화는 하나도 없었다.“
만세보, 1907.12
"애국부인회에서 오늘부터 관인구락부에 모여서 일본에 유학하시는 황태자 전하의 활동사진을
거행한다는 것은 이미 보도했었다. 어제 오후 한 시에 내무대신 송병준(宋秉畯, 노다 ) 씨가
변사 정운복(鄭雲復) 한석진(韓錫振) 김상연(金祥演) 세 사람을 내부로 초청하여 활동사진 대한 연설 방침을 협의하였다”
황성신문, 1908.06.24
“총독부 활동사진을 태람(전략) 이왕가에서는 수년간 상중이신 때문에 사용치 않으셨던 인정전을
오래간만에 화려하게 꾸미시고 배관자는 귀빈으로 이우공 전하 기타 윤 자작, 민 자작 이하의 친척 일동이며
또 부인석에는 여관과 및 이왕 직원 가족 등 약 백명이 배관하였는데 사진영사 기계는 최근 총독부에서 사드린 절대 방화(防火)의
안전품으로 사용하고 영화설명에 대하여 총독부로부터 전중 통역관과 이왕직으로부터 박 사무관이 통역을 하여 드렸는데
영화중에 경마대회 같은 것은 삼일 전에 촬영한 새 사진이며 이왕가로부터 애마(흐흐) 세 머리가 출장하였고 또 명고옥성은 연전에
이왕 전하께서 내지(일본)에 여행할 때 체재하옵시던 인연이 계시던 이궁(離宮)이신 때문에 흥미가 깊으셔서
사진을 비추일 때 누누이 질문이 계셔서 만족히 어람을 하셨더라.“
매일신보, 1921.05.3
변사의 역할-통역자와 해설
비평작업: 영화를 분석하고 설명할 내용을 검토
통역관 역할: 영화 내용을 설명
변사의 영화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데
무성영화 상영과 변사 ? 현장성, 일회성, 관람성 창출
변사는 일본과 한국만의 독특한 영화미학과 영화 산업, 문화구축
- 조선의 근대적인 엔터테이너라는 거지
청각 이미지와 시각이미지가 결합된 종합예술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이었지
당시의 혼종적인 공간인 극장은: 공연물 +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었고
2부: 문화통치와 계몽-프로파간다 영화
(1919~1922) 까지의 내용을 다루겠다.
시대 배경과 영화 정책 기조
1) 3.1운동(1919)의 발생과 문화 정치의 실시
1: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 발표 및
고종의 죽음으로 인한 민족자결주의 의식의 확산
2: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조선의 독립의지의 강화
3: 이에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문화통치'로 변경됨
2) 흥행장 및 흥행 취체규칙(1921)의 도입
1: 취체규칙= 흥행장 건설, 운영, 위생, 소방, 배우등의 관련 조항 제정
2: 연극 각본, 필름, 필름설명서 별로 상연 및 상영 전에 검열
1910년대~1920년대 극장 영화프로그램
<명금 The broken Coin>(1915)
제작사는 유니버설
감독은 프란시스 포드(1881~1953)로
1916년 우미관 상영
1921년 단성사 상영
명금의 연속영화로서의 특징은
1: 절반으로 나눠진 금화의 설정
2: 악인과 팜파탈의 설정
3: 선인과 조력자(기자, 탐정, 경찰, 과학자)등의 설정
4: 선과 악의 조직화(변장, 매복, 급습, 유괴 등)
5: 세계의 광대함
등이 있다.
그 인기는 대단했는데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1919)에 수록되는가 하면
소설< 명금>(1920)
소설로도 출간되었다.(무려 2개의 다른 판본으로!)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찾아 보시라
https://m.blog.naver.com/bookgram/120146045628
미국 연속영화의 의미는 바로 감상의 시대였다.
미국 연속영화의 특성은 활동하는 기술 '스펙터클'을 감상하는 것으로
1) 연극과 구별되는 특성으로는 배우의 신체로 인식
"아메리칸 바디"에 대한 관심과 클로즈업을 통한 다양한 표정연기
2) 여성 존재감에 대한 인식
근대화 수용과 가치의 변화, 여배우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호응
3)스타 시스템과 영화 산업 구축 등이 있다.
미국 연속 영화로 시작된 감상의 시대는
시각적 경험의 보편적인 확산과 영화의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의 관객을 그 소비장 안에 적극 위치시켰고
이는 조선의 연쇄극이 탄생하는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조선의 영화 산업이 변화하였고 제작의 시대가 열린다.
조선 연쇄극의 특징은
서구활극으로서의 영화와 일본 신파 연쇄극이 결합하여 조선식 연쇄극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자꾸 나오는 연쇄극이란 무엇일까?
1) 연쇄극(Kino drama)의미란
연극 가운데 무대에서 표현하기가 어려운 야외장면을 필름으로 미리 촬영하여
무대위의 스크린에 상영함으로써 무대상연과 연결하여 보여주는 공연물이다.
실사기록과 극영화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연쇄극의 의의는 바로 조선에서 영화 흥행의 단계에서 제작 단계로 넘어가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으며
작품의 내용과 형식 뿐 아니라 제작 주체로서의 측면에서 이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영화의 특징적 개념인 볼거리로서의 영화로 해석이 가능하며
무성영화의 전 단계로서 영화적'시네마틱'이라는 개념을 부여한다.
“시네마틱(cinematic)은 미학적, 감정적, 영적 계시가 관련된 것이다.
캐릭터의 복잡성, 모순적이고 역설적 본성등을 예술이라는 형식안에서
스크린 위에 드라마틱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
즉 ‘한국 영화사의 초창기 영화실천 위치로 규정’하는 것이다.
전편에 나왔던 의리적 구토를 살펴보자
조선의 최초 연쇄극 의리적 구토 (1919.10.27)
요즘으로 따지자면 디즈니에서 구축한 ilm x 에픽 게임즈가 협업해서 만든 언리얼 세트장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됨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연쇄극이 없어서 여기던 바, 한번 신파활동사진을
박승필: 조선 흥행계의 대부이자 민족 예술의 수호자
조선 최초 여배우 이월화(1904년 ~ 1933)
부록: 윤백남
조선 신운동의 선구자인 윤백남
소설가, 극작가, 연극인, 영화감독, 매일신보 편집자였으며
1903~1909년 일본 유학
1912년 '문수성' 극단창단
1919년 조선 최초 대중소설 대도전 연재
1923년 월하의 맹서로 최초 감독과 각본가로 데뷔
1925년 백남 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여러 영화 제작및 감독을 하였으며
조선 영화인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백남 프로덕션은 1925년 "순 조선영화의 제작과 외화 수입"을 취지로 설립되어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주삼손, 남궁운, 김우연, 정기탁, 전창근, 김정숙 등을 등용했다.
3부 무성영화의 시대
조선 무성영화 시대는: 1923 ~ 1934년 까지로
당시의 영화 기반은 미서부 연속활극과 일본 신파극의 결합이었으며
영화주류는 일본 신파극의 전성시대였어
<신파 하면은 비극 억지 눈물짜내기 등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게 아니다.
바로 밑밑 문단에 등장하니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조선 무성영화의 고민은 다음과 같았다.
- 영화적(cinematic) 요소를 획득하는 방식
- 이야기 영상의 극화
미국 활극과 일본 신파의 결합임은 이미 이전 글에 상술했기고
활극에 대해서 설명했기에 신파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신파영화란?
현대 배경으로 한 현대적 소재를 다른 극영화로
신파극(新派劇)이란, 근현대 동양(특히 일본)에서 서양식 연극을 기반으로 만든 연극을 가리키던 말이다.
즉 일본의 기존 연극 문화인 가부키를 '구극(舊劇)', '구파(舊派)'이라 하고 서양 연극을 '신파'라고 했던 것이다.
1888년 즈음에 시작되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하였다.
나무위키 중에서
‘신파비극’, ‘신파활극’ 등을 명기
서구 멜로 드라마가 일본의 신파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수용되었다.
미국 멜로 드라마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선과 악의 갈등
선의 궁극적 승리
주요 유형: 남녀주인공과 악당
감정의 과장된 미학
판에 박힌 주인공 운명과 우연의 일치
모험으로 채워진 액션
극적 폭로와 과시적인 행동의 순간
Orphans of the Storm
영화사를 다루려면 빼놓을 수 없는 그 이름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1875~ 1948)
일본 신파극은 1888년 일본에서 연극을 정치 프로파간다로 이용하면서 싹튼 양식으로
정치극, 시사 오락극에서 시작해서 가정 비극으로 정착된 일본의 흥행극으로
통속적인 가치관의 표상화, 상업주의, 감상주의 등으로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었고
이에 한국 신파 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변했다.
일본의 영향으로 신파 극단이 영화계에 유입되었고
성공한 연극들을 영화화 하여 멜로 비극<장한몽>이 대흥행하여
대중의 코드가 신파 비극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장르적 토대는 미국의 활극성을 기반으로 하였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온다
시대 분위기: 1920년대 일제 강점기 특유의 정서인 슬픔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파의 패배주의적 세계관과 감상성에서 연유되었다.
*예시
사랑과 배신의 아이콘이며 신파극의 대명사
<장한몽>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감독: 이경손(1926년작)
주연: 김정숙, 심태식(심훈)
제작: 계림영화사
개봉: 단성사
당시 한국 신파의 특징
비극적(식민지배) 상황 속의 멜로드라마
근대화 경험과 싹트기 시작하는 자유연애
초기 무성 영화계에서 최초의 본격 활극 영화는 국경이 존재한다.
감독: 김도산, 원산만(일본인)
원작: 윤백남
제작: 단성사, 쇼치쿠, 신극좌
출연: 김도산, 신극좌,파단원
한국 최초의 (극영화)가 <국경>이라는 논쟁이 존재하는데
<김종원의 거주지 귀착설>
원산만 일본인,일본인 영화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생활근거지가 한국이고, 소재나 관람
대상이 우리 문화와 정서와 맞게 기획되었다면 우리영화
이전편에 상술한 월하의 맹서와 같이 최초 극영화 논쟁이 존재한다.
논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국경: 상업자본 동원
단성사 유료상영 영화
근대적인 제작 배급 상영구조
월하의 맹서: 일제 자본의 정책영화
공공기관 무료상영
<조선 최초 상업영화>
춘향전(1923)
1912년 소설『옥중화』 토대로 제작,
한국인이 손수 만든 최초 영화, 기승전결 극영화로
조선인 관객을 전제로 제작했으며
기생표상과 남원이라는 이국적 풍경에 초점을 맞추었고
- 조선적’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들 최초 구축했다
이 영화가 가져온 조선 영화계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조선 무성영화 시기의 제작 구도도를 구축하여
일본인들의 한국 영화 제작이 속출했으며
일본인 흥행사의 자본과 기술 주도와 조선인의 자생적 움직임이라는
조선 무성영화 시기의 제작 구도도를 구축하였다.
두번째로 조선 흥행계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어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1924)으로 맞불을 놓았고
세번째로는 조선영화의 시네마틱에 대한 화두를 제시했으며
네번째로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 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을 추동했다.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1923)
백남 프로덕션(1925)
계림 영화협회(1925)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장편'극영화 장화 홍련전은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중요한 성립 요건인 기술마저도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 영화로 최초의 조선인 촬영기사였던 이필우가 영화로 데뷔했으며
당시에 대 흥행을 이루었다.
이에 조선 영화계가 싹트자 일본 신파영화 제작사와 조선 영화인들이 협업을 하게 되는데
단성사의 박승필
동아문화협회(1919):하야카와 마쓰지로 대표작<춘향전>(1923)
조선키네마 주식회사(1923):영화 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으로 초기 영화인들이 대거 합류(윤백남 포함)
백남 프로덕션(1925): 윤백남-조선 영화인 주축
계림 영화협회(1925):조일재-<장한몽>당대 조선이 제일 좋아하는 신파극을 제작
단성사 영화제작부는 여러번 설명했으니 생략하겠다.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는 당시 한국 영화 역사상 최대의 제작사로
1924년 무대예술연구회 유입과 회사 설립- 안종화, 이경손등
단성사와 특약을 맺었으며 <해의 비곡> 창립작, 감독: 왕필영(일본), 조연출: 이경손
1925년 <운영전> 흥행을 성공시켰다, 감독: 윤백남
그러나 설립후 1년만에 조선 영화인들의 탈퇴와 회사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경영진 또한 일본 상공인을 중심으로 의사, 변호사, 승려 등 각계 종사자를 주축으로
투자자가 형성되어 영화 관계자가 전무하여 제작사로서는 조직적이지 못한 불합리함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기술진은 전원 일본에서 초청된 자들로 채워졌었다.
백남 프로덕션 또한 상술했기에 간략히 설명하자면
1925년 연구생을 모집하였고 교육했고 백남의 일본 방문과 회사는 해체되었고
이후 백남에서 탈퇴한 영화인들이 모여 고려 키네마를 설립하였으며 설립자는 이경손이었다.
이후 조선 영화인 계보는 다음과 같다.
단성계(박승필)
- 이필우(최초의 촬영기사)
- 이구영(감독, 평론)
백남계(윤백남)
- 이경손(배우, 감독,평론): 고려키네마(1925) 이경손프로덕션(1926)
- 나운규(배우, 감독): 나운규프로덕션(1927)
- 심 훈(배우, 감독)
이필우: 한국 영화 기술의 개척자
1913년 우미관 영사기사
1914년 일본유학
1920년 <지기 知己> 촬영- 최초 한국인 촬영기사
1920년 최고 흥행신파 <장한몽> 촬영
1924년 단성사 촬영부 전속기사
- 우리 나라 최초 체육기록영화 <전선여자정구대회> 촬영
1924년<장화홍련전> 촬영·현상·편집
1925년 고려영화사 창립
1933년 PKR발성장치를 개발
- 1935년 우리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을 완성
이경손:영화제작 선구자, 독립운동가, 조선인 최초의 카페 사장
1920년 연극활동과 무대예술연구회 조직
1924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기진으로 입사
- 1925년 윤백남 감독의 조감독/ 출연
1925년 윤백남 프로덕션 <심청전>(1925) 연출
1925년 『고려키네마』 창립 문예영화 <개척자>(1925) 감독
1926 계림영화사 창립
- 최고 흥행 신파영화 <장한몽> 연출
1926년 항일색채 영화소설 <백의인 白衣人>을 ≪조선일보≫에 연재
1928년『이경손프로덕션』창립, 카페 카카듀 설립
1931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를 위하여 활동
독립운동가를 다루는 영화 밀정에도 나오는 카카듀 카페
시대적 배경과 영화 환경은 다음과 같다.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1926)의 제정
영화상영허가 사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도서실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일원화
한국 영화를 검열하기 위해 제정한 법령으로
- 영사 제한ㆍ금지 명령권ㆍ극장 임검제 따위의 사전 검열 형식으로 통제했다.
제1조: 활동사진의 필름은 본령에 의해 검열을 거친 것이 아니면 이를 영사하여 다중의
관람에 제공할 수 없다
제3조: 검열관청은 검열할 필름을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다고 인정될 경 우
해당 필름에 제 1호 양식의 검인을 날인하여 설명대본에 제2호 양식에 따라 그
취지를 기재한다
제7조: 필름의 검열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다음의 수수료를 검열관청에 납부해야 한다.
- 1920년대 중반, 조선영화 장(場)의 각축시대가 열리는데
조선 영화산업이 변화하면서
일본 제작사와 조선 영화인의 도제와 협업 시스템으로 약20여개의 영화사가 설립된다.
윗 링크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1926)이 제작한 아리랑의 성공으로 영화 창작의 자극제가 되었고
덕영프로덕션(1927)/ 대륙키네마프로덕션(1928)/ 경성촬영소 원산프로덕션(1930)
백남프로덕션(1925) / 계림영화협회(1925)/나운규프로덕션(1927)/ 이경손프로덕션(1929)등이 생겼다.
덩달아 상설관(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끼리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입장료, 상영작 경쟁등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관객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거대화 되어가는 영화자본으로 인해
기신양행(1927): MGM과 파라마운틴과 특약을 맺고 영화배급권을,
덕영상회(1927): 워너브라더스, F.B.O사등의 영화배급권을 따낸다.
이로인해 영화문화가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조선영화가 제작된다
<아리랑>(1927)-수도없이 나오지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영화의 인기 상승과 질적 상승으로 인한 관람료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상설관 끼리의 경쟁에 따라 내려가지만-
조선 무성 영화의 스타일이 구축되어 질적 향상을 이루었고
보다 깊은 고민인 영화촬영, 연기, 연출 등 영화자체의 본질이나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 전성기는 조선영화인들의 개성있는 미학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였다.
예시) 대표 영화인 3인
이경손(1905~1977)
제작/감독/작가
초기 영화인의 정신적 행로
김영환(1898~ 1936)
민족적 정서성향
변사/감독/작곡가
나운규(1902~1937, 함경북도 회령)
제작/감독/배우
근대영화사의 전설
조선 영화사는 윤백남, 이경손을 거쳐 나운규의 시대가 열리는데
신파화법를 넘어선 독창적 스타일을 개척했으며
조선 무성영화는 그가 제작한 <아리랑> 전후로 구분된다.
<무성 영화 시기 최고의 스타였던 나운규>
영화인 이전에 독립운동가였는데
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에 참가했고
청회선 파괴 음모사건(1921.03.16) 판결문
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 징역 2년, 나운규(羅雲奎, 20)
회령군 회령면 2동 26번지 징역 2년6개월, 윤봉춘(尹逢春, 20)
1920년 비밀결사조직 도판부시절 나운규와 윤봉춘(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영화인)
윤봉춘(1902 ~ 1975)
1923년 청진형무소 2년만기 출소 사진
나운규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23년 지방 순회공연 <예림단>단원으로 시작
1924년 최초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
- 1924년 <해의 비곡>의 단역을 맡고
1925년 백남프로덕션에 입사하여
- 1925년 <운영전>(감독: 윤백남) 가마꾼으로 출연
- 1925년 <심청전>(감독: 이경손)의 심봉사 역을 맡고
이후 1926년 <아리랑> 감독 데뷔
- 조선 최고 영화인 위상을 얻게되며
이후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
- <아리랑>후속 제작 및 문예영화에 주력
- 발성영화 <아리랑 3>을 연출한다
이후 193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 최초의 영화인 장으로 단성사에서 거행
<농중조>(1926) 이규설 감독
전편을 통하여 카페에 양안식과 공진삼이가 술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가장 우수한 장면이라 하겠으며 진삼이가 길에서 자전거에 부딪치며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치는 장면은 가장 유모어 한 재미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멍덩한 중에 나운규군의 힘 있는 선굵은 연출만이
홀로히 뛰어나서 단조로운 스토리를 잘 조화하여서 가끔 웃기는 것이 저으기
성공이라 하겠다. 이 일편 만으로서도 나군이
얼마나 영화배우로서의 소질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27일
<풍운아>(1926) 각본과 감독
제작: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촬영과 현상: 이창용
편집 나운규
임자없는 나룻배(1932)
감독/각색 /주연: 나운규
야마니 양행 <아리랑>일본 전단지(1927)
내용 일부가 삭제된 상태이긴 하지만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 동포사회와 일본의 조선인 노동 현장 가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아리랑 3편> 조선중앙일보(1936)
- 토키영화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아리랑>을 촬영할 때에 내 자신은 전신이 열에 끓어오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 <풍운아>(1926)
- <사랑을 찾아서>(1928)
- <벙어리 삼룡>(1929)
등 27편의 영화에 참여했는데 그중 주연 21편, 연출 18편, 주연 및 감독 16편을 찍었다.
독일표현주의
<부록>
공산주의와 카프영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n)영화가 나왔는데
사회적 배경: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프롤레타리아 문학 ·예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카프의 출발은 당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식, 예술인들의 고민이었으며
1920말~1930초 카프, 해방후 영화 동맹을 중심으로 영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제에 맞게 해방전만 다룰거임 안그럼 정떡묻어서 북유게 가야함)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1925)
조선영화예술협회(1927)
- 이경손, 김을한, 안종화, 윤기정, 임화등 주축
김유영, 서광제 , 임화, 연구생의 주도권 장악, 서울 키노(1928) 설립
- 김유영의 <유랑> (1928) 제작, <혼가>(1929), <암로>(1929, 강호)
- 제2기 서울 키노(1930) ? 김유정, 서광제, 안석영등
- 제3기 서울키노(1931) ? 윤기정, 김남천, 임화등
카프 기능
평론을 통한 정론적 예술비평이 중심
- 영화 이론과 평론계 주도
- 외국 영화에 대한 정보와 이론소개
『문예운동 文藝運動』(1926)을 발간하여 그들의 이념 전파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
-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심화
- 작가들이 창작을 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하려는 노력
총 5편의 영화제작
<유랑>(1928)< 암로>(1928), <혼가>(1931), <화륜><지하촌>(1931)
카프(영화)운동의 의의
영화 비평 담론에서 리얼리즘을 비평 방법론으로 제기하였고
영화의 계몽적 성격 주목, 계몽적 비평의 전통, 작품의 공리적 성격을 부각했다.
상술한 아리랑과 비견되는 작품이 있으니 이는 바로 <임자없는 나룻배>라고 하겠다.
<임자없는 나룻배>
감독: 이규환(1932)
주연: 나운규, 문예봉, 김연실
개봉: 단성사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로
나운규 <아리랑>이 행동적, 민중적 저항의식을 대변한다면
이규환<임자없는 나룻배>는 서정적이면서 향토적인 저항의식을 대변한다.
유리 원판 필름의 발견
항일표현’으로 의심받은 <임자없는 나룻배>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 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치 단순한 스토리로 그만치 성공한 것은 감독, 촬영, 연기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운규가 주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 민족이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로 볼 때 비로소 그 감격이 커지는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일을 빼앗기고 아내를 빼앗기고 또다시 생명의 줄과 딸을 빼앗기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거기 대항할 아무런 복안도 없이 오직 신명께 기도나 올리고 있는 춘삼이 그것은 곧 조선 민족의 한 전형이다.
(중략) 조선인으로는 한 번 보지 않으면 안 될 사진이다.
동아일보, 1932, 9, 14
「임자 없는 나룻배」! 여러 가지 조선 영화에서 가장 시적 표현인 제목이다. (중략)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일관하여 있다.
농촌 생활에 파경을 당한 자의 막연한 상경은 늘 이러한 비극을 지어내기 쉬운 것이다.
생계를 잃어버린 농군들의 도시 진출, 거기에는 항상 빈곤과 도회적 유혹이 쫓아다닌다.
이 빈곤과 유혹 사이에 끼여 싸우는 자, 또 이러한 비극을 빚어내는 자, 어찌 춘삼의 아내뿐이랴.
(중략) 이 작품을 가리켜 조선 현실을 잘 표현한 온건한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매일신보』 1932년 9월
시각적 상징성(로컬적 담론)으로는
근대화의 표상과 전지 체제의 수단과
그에 대비되는 조선 민족의 현실을 나타냈다.
흥행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이규환의 연출력
3. 대배우 명연기
대배우 무뇌봉,,,,,
아니 1930년대 은막의 여왕 ‘문예봉’
문예봉 (1917~1999)
<임자 없는 나룻배>
(1932)
<미몽>(1936)
현존 최고(最古)였던 무성영화<청춘의 십자로>
안종화
모던시대와 한국영화는 두가지 시기로 나뉘어
1. 1930년대~1940년대 발성영화 시대
2. 1940년대~1945년 해방까지 전시체제 조선영화
1930년대 이후 영화계는 대격변을 맞이하는데
토키시대, 전시체제, 2세대 영화인의 등장
즉 유성영화, 37년 중일전쟁, 일본 유학파의 등장이야.
발성영화 시대 (1935~1940)
발성영화 시대 도래: 1920년대 후반 이후
최초 장편 유성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 (1927)
감독: 앨런 크로슬랜드
제작: 워너브라더스
제1회 아카데미(1929) 각색상 노미네이트
'라디오의 아버지’, 최초의 삼극진공관 ‘오디온(Audion)’ 발명(1920)
리 드 포레스트 (Lee de Forest, 1873~ 1961)
드 포레스트 단편영화 상영 광고(미국, 1925)
1930년 이후 경성 영화상설관의 발성극영화 상영
1930년 1월 27일 조선일보
1. 주도: 조선극장(발성영화 중심)
단성사(무성영화 중심)
2. 배급사: 기신양행, 동양영화사
3. 발성영화 상영방식: 변사
- 1930년 이후 부터 발성영화시스템의 대극장전환
=>식민지 조선의 발성영화 제작 시도와 기술기반
조선영화 부흥 ? 발성 영화
2: 서구 토키 영화 흥행
5: 서구영화 상영 제한
1934년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
<말 못할 사정>
제작사: 원방각사
제작 및 기획: 나운규, 이필우
출연 춘사 나운규, 석금성, 심영(!)등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과 촬영기사 이필우
이필우(1897 ~ 1978): 한국 최초 촬영 기사
일본과 중국등에서 사운드 연구
1: Vitaphone(sound-on-disc)방식 연구
- <말 못할 사정> 감독: 나운규
<홍길동전 속편>(1936)의 동시녹음 현장
경성촬영소 제작 인력과 역할: 조선과 일본의 협업
김소봉(일)
이명우(조)
양주남(편)
황운조(현)
이명우(편)
이필우(현)
경성촬영소 제작 영화
저기 계속 나오는 와케지마 슈지로가 누구냐고?
<무정>(1938)
감독: 박기채
<새출발>(1938)
감독: 이규환
<수선화>(1940)
감독: 김유영
- 설립자는 이창용(1907~ 1961)으로 - 유일한 조선의 프로듀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창용,
동양극장
유장산(현상)
경성현상소 현상
최인규
방한준
경성현상소 현상
경성현상소 현상
극동현상소 현상
*: 일본유학파 2세대영화인 활약
<나그네>(1937)
감독: 이규한
출연: 문예봉, 왕평
<한강>(1938) 감독: 방한준(1906~1950)
<어화>(1939) 감독: 안철영(1909~ ?)
2: 극영화와 기록영화 사이에서 사실주의적인 양식 “반실사작품“
3: 조선영화의 '리리시즘 (lyricism)'의 재론
승화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각을 제시했어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은 바로 이규환이야
- 1940년대~해방전까지
식민 통치를 위한 선전영화
- ‘문화영화’제작
동조하고 이를 위해 계몽 설파하는 목적영화
-2: 국책영화 :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전시 동원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 시책의 영화 지칭
역사적 가치판단 배제
-3: 어용영화 : 영화예술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져버리고 그 시대의 권력가나 기관에 아부하여 그의
정책에 공명하는 영화.
‘친일영화’는 스스로 일제 정책에 순응하여 협조하는 영화, ‘국책영화’는 권력기관이
추구하는 정책을 계몽하기 위해 기관이 직접 제작한 영화
-4: 합작 선전영화 : 일제의 정책선전을 식민지 주민에게 주입하기 위해 합작 형태로 식민지의 인력과
자본을 동원하여 제작된 영화
기관의 지원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거나 간접적인 지원을받고 유통된 영화
2: 한국영화사에서 문화영화와 국가 직접 제작 영화이거나 국영화된 회사에서 제작한 영화
1930년대 일본에서 도입, 우파 영화, 교육, 계몽 영화, 전쟁 기록영화, 과학 영화, 민족 영화등
기록영화를 통칭, 이데올로기 전파와 국민 통합 목적
독일의 공중 위생 정책의 핵심인 건강관리와 위생을 합하여 위생으로 번역. 국가가 일반 국민 건강과
위생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
- <월하의 맹서>는 체신국에서 우편 저금 장려용 영화(1923)
3) 뉴스 영화: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시 상황에 돌입한 뒤 영화의 선전-계몽 역할이 더
욱 강화됨에 따라 정책, 산업 양면에서 뉴스영화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망루의 결사대>(1943)
제작: 고려영화협회. 동보영화주식회사
감독: 이마이 다다시
댓글(6)
친일 영화의 경우 일본정부에서 천막쳐서 동네 사람들 모아서 공짜로 틀어주지 읺았을까 선동물로...
ㅇㅇ 위에 있잖아 친일/정부 정책 선전 영화는 무료 상영했다고
그엏군 글이 넘 많아서 못읽었나봐
자 얌전히 베스트에 가거라
그리고 착한 영화글 유게이가 되거라
분량 뭐임 엄청 자세하네 직접 쓴거? ㅊㅊ
으아악 엄청난 분량이다앗!
그치만 이런 글은 추천을 줄 수 밖에 없다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