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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상.. | 25/01/05 22:20 | 추천 11 | 조회 9

[유머] 영화)개화기 시기부터 일제시대까지의 한국 영화사※장문주의 +9 [6]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9064751

프롤로그: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들




우리나라에 최초로 영화를 들여온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홈즈씨다.

셜록 홈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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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버튼 홈즈(burton holmes)씨다.




여행가겸 사진작가겸 영화제작자인 버튼 홈즈씨는

1901년 당시 고종 황제에게 영화 정확히는 당시 명칭인 활동사진을 소개했다.

뮤토스코프와 키노라 2종류를 소개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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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토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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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라



두개 다 크랭크 축을 돌리면 사진집이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원시적인 -1인용- 영화장치다.




또한 최초로 한국에서 영화-활동사진-를 촬영한 사람이다.





최초로 상영된 영화와 최초로 촬영된 영화의 소개를 마쳤으니

이제 최초로 상업적 영화를 상영한 곳을 말하겠다.



최초로 상업적 영화를 상영한 곳은 어디냐고?


바로 동대문 활동사진소다.


1903년 한성전기주식회사가 주최한

동대문 기계창고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고 크게 흥행했다.


전차표 수익을 위한 홍보 영화였으면서


한국 영화사의 효시가 된 이 영화 상영은

당시 큰 충격을 주었는데 신문기사까지 나왔다.



"전차를 타고 온 관객들로 상영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매일 밤 입장수익이 백여원에 달했으며 덩달아 전차표 수익도 올랐다"


1903년 7월 10일자 [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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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봐도 바글바글 하지 않나?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1부 해방전 조선 영화계: 기원과 영화관 그리고 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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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잔 중에서


환등기 개화기 이전 에도시대에 들어온 이 환등기는

일본식 조어 영상의 기원이 되었다.


지금은 영상하면 동영상(움직이는 영상)을 대체했지만

원래는 상이 비친 이미지를 뜻했다.



해방전 조선 영화는 당시 인기였던 수입한 서구 활극 영화와

기술을 배워오던 일본 문법과 스케일의 조합이었다.



당시 문화 예술인과 엘리트들의 영화계 참여는 활발했는데


어느 예술보다 대중적 파급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예술성을 반영할 수 있는 매체 본연의 힘과

최첨단 근대예술인 영화예술계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자부심

어느 예술보다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등등이 있다.


그러나 조선의 영화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선발되어야 했던 것이 존재했는데

그 문제란 바로 조선에는 극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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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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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연희



이에 옥내 극장이 들어서는데
이는 공동체의 결속과 위안을 주던 연희가 완전히 자본주의 소비상품으로 전황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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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연예기획사 협률사(1902~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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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1910 설립)




활동사진의 최초 문헌자료


<황성신문> 1901년 9월 14일자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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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寫眞活動勝於生人活動)

활동사진’이라는 용어가 발견된 최초 문헌 자료이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 동화)’이라 할 만하다. …

사람들이 영화에서 활동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진실로 바라는 것은 백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




첫 활동사진의 민간 공개

1903년 6월23일 『황성신문』

위 링크의 한성전기 주식회사에서 상영한 활동사진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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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계속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생한(生命) 도시, 각종 극적인

장면(劇場)의 절승한 광경이 준비되었습니다. 입장 요금 동화 10전.”


상영: 요시자와 상점(1897년 경 설립)



이 동대문활동사진소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1898년 한성전기회사 차고 안에 설치한 가설무대가 그 전신

1907년 6월 흥행단체인 광무대가 인수 ‘광무대’ 이름으로 운영

1908년 박승필이 광무대를 임대하여 광무대가 연희극장으로 사용되기 시작

- 전통 연희극장으로 변모(판소리와 창극 보호)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광무대는 일본와사전기회사의 소유로 귀속

1913년 일본와사전기회사 사업확장으로 폐관

1913년 일본인 소유 극장 연기관을 임대하여 다시 광무대라 칭하고 공연을 재개

1910년 시대추세에 따라 활동사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단성사를 인수 영화관으로 개관

192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파극이나 신극단체에도 대관 - 1925년 토월회와 전용대여

1930년 방화사건으로 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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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파테 로고-



아스터 하우스: 조선에 들어온 파테 영화

https://brunch.co.kr/@sangeonhan/207
참고한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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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아스터 하우스(프랑스인 마탱이 운영)


아스터 하우스에서는 1년간 매일 저녁 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그 영화들은 프랑스 파테사에서 제작되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으로 외국인을 위한 호텔 건립되었는데

이는 1899년 재물포에서 노량진 까지 운행하는 경인선과 1년후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경인선은 서대문 정차장까지 연장되었다.
서대문 정차장까지 기차가 다니게 되자 기차역앞에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호텔이 지어졌는데
처음 이름은 스테이션 호텔, 우리말로는 정거장 호텔이었다.

원래는 외국인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면 인천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기에 개항 직후부터 대불호텔, 스튜어드 호텔, 꼬레 호텔 등이 존재했는데

경인선이 개통되자 시간을 잘 맞춘다면 인천에서 숙박하지 않고 바로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되면서
인천의 호텔업이 침체되고 한성의 호텔업이 성장하였으며 이때 만들어진 호텔이 스테이션 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원래 영국인 선교사 엠블리가 지은 곳으로
1905년 프랑스인 마탱이 인수하였으며 지금도 존재하는 아스터 하우스 체인에 합류하여 이름을 개명한다.

경인선의 종점인 서대문 정차장이 지금의 서대문 로터리 인근인지라 외교공관이 몰려있게 되었고
가까이에 프랑스 영사관과 이탈리아 영사관이, 역에서 내려서 5분만 걸어가면 되는 정동에서는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영사관이 밀집되어 있었고 기리하여 서대문 정차장은
외국 영사관이 둘러쌓인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인 철도의 주된 사용인물들은 인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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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한매일신보 활동사진을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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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던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이 만든 희대 ‘협률사‘

- 국악예술 공연 중심이었고


1908년 이인직(1862~1916)이 ‘원각사'로 개명
- 고전 창극 공연과 영화를 상영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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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성 극장가 형성 구도는 위 짤과 같은데


민족별 이용객을 나눠서 극장이 형성되었어


일본인 주도의 영화가 흥행하였으며

구역은
북촌(종로)-조선인 거주지
남촌(충무로)-일본인 거주지로 나뉘게 돼

북촌은 연흥사(1907), 장안사(1907~1908?), 우미관(1912), 단성사(1918) 등이 있으며

남촌에는 가부키 전용 극장이 다수였고
활동사진 전용관은 경성 고등 연예관(1910), 유락관(1915)이 있었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은 경성 고등 연예관으로 1910년 설립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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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2층 목조 건물. 600여 명

영화 수입: 프랑스 파테영화사

요금: 특등선 1원, 일등석 50전,

이등석 30전, 삼등석 20전,

사등석 10전

단체관람 할인

- 자본주의 영화 유입현상 확대

- 시설의 고급화와 대형화




조선인 전용 3대 활동사진관은 안타깝게도 일본인 흥행사가 주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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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관(1910)



일본인 동업으로 설관하였으며


1910년 경성 고등 연예관으로 설립되어

1915년 우미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어


개관 당시에는 일본 직수입 형태를 띄었으며

15년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였고

16년 일본 하리마 유니버설과 계약을 맺어 서양영화 전문관으로 흥행하였고

1928년 국내 최초로 토키영화(유성영화)를 상영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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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1907)


대한민곡 최초의 본격 상설 영화관

1907년 종로 3가에 목조 2층 건물인 연예 단성사로 개관


1918년 광무대의 운영자이자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인 박승필(1875~1932)이 인수하였고

최초 상설 영화관으로 변모하게 되었어


일류 변사와 전속 관현악단을 기용하였지


1919년 10월 27일 최초로 국내 자본으로 의리적 구토(감독 김도산)을 상영하였고

(이에 10월 27일은 한국 영화의 날로 지정됨)

자체 제작, 상영 배급을 하였고

덴카쓰, 쇼치쿠, 유니버설에서 필름을 공급했으며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등 무성영화의 주옥과 같은 작품을 상영했다.

장화홍련전(1924)같은 조선인들이 만든 최초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새로운 문화매체로서의 역할인 다양한 공연의 무대를 재공했다.


아리랑(1926)상영으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냈으며

2년 연속 상영이라는 대기록과 흥행으로

명실 상부 최고의 상설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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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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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1902~1937) 감독, 각본, 주연>



<1945년, 8.15 해방 뒤에도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전국을 돌며 상영되어 서울에서만 9번이나 개봉되었고,

1952년 9월 <영남일보> 광고에 따르면 만경관에서도 1주간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에 영화 필름이 소실되었고 일본에만 남아있다는 소문만이 남았다.>




1926년 ‘대륙극장으로 개칭

광복 후 다시 단성사로 복귀하여 악극을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연혁은 다음과 같아



2001년 구 건물이 철거됨.


2005년 지하 4층, 지상 9층-7개관의 멀티플렉스 재개관

3개관을 추가하여 총 10관에 1,806석 규모 극장.


2008년 4월 멀티플렉스 체인인 씨너스 단성사

11월 아산엠그룹이 인수 후 아산엠단성사로 출범.


2012년 법원, 경매 개시 결정.


2016년 단성골드빌딩으로 명칭 변경.

단성골드주얼리센터 오픈.



참으로 안타깝지만 역사는 자본의 논리에 무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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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1922~1936)


위치는 종로구 인사동


연극 공연을 겸한 고급 영화 상설관을 표방하였으며

제일 늦은 만큼 최신식 극장이었대


한국 연극사의 한 획을 그은 토월회를 기반으로 진행하였으며

(1922년 토월회 창립 공연)


1930년대 영화 상설 극장으로 전환하였으나 동양극장(1935)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고


1936년 방화로 폐관되었어








무성영화시대의 목소리이자 최초의 연예인/ 당시 최고의 스타는 바로 변사라 하겠는데


당시 조선의 최고의 스타는 서상호 변사였어(1890~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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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17일 조선일보


1920년 여름 조선일보 경북지국이 주최한 영화 상영회를 알린 사고(社告).

인기 변사 서상호의 사진을 싣고 그가 해설한다는 사실 강조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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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영화 상영의 관행은 변사(辯士): 전설(前說)/해설(解說).이 있는데


최종적 창작자로 최초의 영화 스타이며 전통 연행의 유산이 되었지(1인 진행)


복합적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본편+단편들+막간 공연 등으로 5시간 정도 소요되었어


1920년대 무성영화 극장의 삼사로는


영화의 활동을 가능케 한 기사

관객과 대면하며 영화의 흥행을 좌우한 변사

음악으로 관람 분위기를 돋운 악사 등이 있어






<청춘의 십자로>(1934)

감독: 안종화(1902~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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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십자로>(2008)

연출: 김태용

변사: 조희봉





누가 뭐라 하더라도 무성영화의 꽃은 변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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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최후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 감독


마지막 변사 신출(1928~2015)의 연기




변사는 설명 변사와 연극 변사로 나뉘었는데


설명 변사는 상영시 자막을 읽어주거나 내용을 설명했으며

-조선 변사는 주로 설명 변사였다.-

연극 변사는 일본 영화 중심으로 목소리 연기를 했어




변사의 기원과 역할


변사의 기원은 (1896~1939)년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변사는 (1899~1940)년


"그저께 밤 오후 여덟시 중명전에서 활동사진을 열어 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태자비

그리고 영친왕 저하와 황귀비께서 관람에 임하셨는데 '전무과 기사 원희정' 씨의 설명으로

빙활(氷滑), 군함의 수병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 해수욕장의 광경 등

20여종을 모두 관람하셨는데 전쟁영화는 하나도 없었다.“


만세보, 1907.12



"애국부인회에서 오늘부터 관인구락부에 모여서 일본에 유학하시는 황태자 전하의 활동사진을

거행한다는 것은 이미 보도했었다. 어제 오후 한 시에 내무대신 송병준(宋秉畯, 노다 ) 씨가

변사 정운복(鄭雲復) 한석진(韓錫振) 김상연(金祥演) 세 사람을 내부로 초청하여 활동사진 대한 연설 방침을 협의하였다”


황성신문, 1908.06.24


“총독부 활동사진을 태람(전략) 이왕가에서는 수년간 상중이신 때문에 사용치 않으셨던 인정전을

오래간만에 화려하게 꾸미시고 배관자는 귀빈으로 이우공 전하 기타 윤 자작, 민 자작 이하의 친척 일동이며

또 부인석에는 여관과 및 이왕 직원 가족 등 약 백명이 배관하였는데 사진영사 기계는 최근 총독부에서 사드린 절대 방화(防火)의

안전품으로 사용하고 영화설명에 대하여 총독부로부터 전중 통역관과 이왕직으로부터 박 사무관이 통역을 하여 드렸는데

영화중에 경마대회 같은 것은 삼일 전에 촬영한 새 사진이며 이왕가로부터 애마(흐흐) 세 머리가 출장하였고 또 명고옥성은 연전에

이왕 전하께서 내지(일본)에 여행할 때 체재하옵시던 인연이 계시던 이궁(離宮)이신 때문에 흥미가 깊으셔서

사진을 비추일 때 누누이 질문이 계셔서 만족히 어람을 하셨더라.“


매일신보, 1921.05.3



변사의 역할-통역자와 해설

비평작업: 영화를 분석하고 설명할 내용을 검토

통역관 역할: 영화 내용을 설명




변사의 영화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데


무성영화 상영과 변사 ? 현장성, 일회성, 관람성 창출


변사는 일본과 한국만의 독특한 영화미학과 영화 산업, 문화구축

- 조선의 근대적인 엔터테이너라는 거지


공연자로서 조선변사는 마당놀이라는 전통극의 특징을 나타내는데 반해
일본변사는 해설자 역할에 국한된다는 차이가 있어

청각 이미지와 시각이미지가 결합된 종합예술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이었지



당시의 혼종적인 공간인 극장은: 공연물 +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었고










2부: 문화통치와 계몽-프로파간다 영화


(1919~1922) 까지의 내용을 다루겠다.



시대 배경과 영화 정책 기조


1) 3.1운동(1919)의 발생과 문화 정치의 실시


1: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 발표 및

고종의 죽음으로 인한 민족자결주의 의식의 확산


2: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조선의 독립의지의 강화


3: 이에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문화통치'로 변경됨


2) 흥행장 및 흥행 취체규칙(1921)의 도입


1: 취체규칙= 흥행장 건설, 운영, 위생, 소방, 배우등의 관련 조항 제정


2: 연극 각본, 필름, 필름설명서 별로 상연 및 상영 전에 검열







1910년대~1920년대 극장 영화프로그램


우미관과 단성사


미국 연속영화(serial film)유행
조선 ‘연쇄극영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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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금 The broken Coin>(1915)

제작사는 유니버설

감독은 프란시스 포드(1881~1953)로


1916년 우미관 상영

1921년 단성사 상영


명금의 연속영화로서의 특징은


1: 절반으로 나눠진 금화의 설정

2: 악인과 팜파탈의 설정

3: 선인과 조력자(기자, 탐정, 경찰, 과학자)등의 설정

4: 선과 악의 조직화(변장, 매복, 급습, 유괴 등)

5: 세계의 광대함


등이 있다.


그 인기는 대단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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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1919)에 수록되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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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명금>(1920)


소설로도 출간되었다.(무려 2개의 다른 판본으로!)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찾아 보시라

https://m.blog.naver.com/bookgram/120146045628



미국 연속영화의 의미는 바로 감상의 시대였다.


미국 연속영화의 특성은 활동하는 기술 '스펙터클'을 감상하는 것으로

1) 연극과 구별되는 특성으로는 배우의 신체로 인식

"아메리칸 바디"에 대한 관심과 클로즈업을 통한 다양한 표정연기

2) 여성 존재감에 대한 인식

근대화 수용과 가치의 변화, 여배우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호응

3)스타 시스템과 영화 산업 구축 등이 있다.


미국 연속 영화로 시작된 감상의 시대는

시각적 경험의 보편적인 확산과 영화의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의 관객을 그 소비장 안에 적극 위치시켰고

이는 조선의 연쇄극이 탄생하는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조선의 영화 산업이 변화하였고 제작의 시대가 열린다.



조선 연쇄극의 특징은


서구활극으로서의 영화와 일본 신파 연쇄극이 결합하여 조선식 연쇄극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자꾸 나오는 연쇄극이란 무엇일까?


1) 연쇄극(Kino drama)의미란

연극 가운데 무대에서 표현하기가 어려운 야외장면을 필름으로 미리 촬영하여

무대위의 스크린에 상영함으로써 무대상연과 연결하여 보여주는 공연물이다.


실사기록과 극영화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연쇄극의 의의는 바로 조선에서 영화 흥행의 단계에서 제작 단계로 넘어가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으며

작품의 내용과 형식 뿐 아니라 제작 주체로서의 측면에서 이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영화의 특징적 개념인 볼거리로서의 영화로 해석이 가능하며

무성영화의 전 단계로서 영화적'시네마틱'이라는 개념을 부여한다.


“시네마틱(cinematic)은 미학적, 감정적, 영적 계시가 관련된 것이다.

캐릭터의 복잡성, 모순적이고 역설적 본성등을 예술이라는 형식안에서

스크린 위에 드라마틱하게 확장시키는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


즉 ‘한국 영화사의 초창기 영화실천 위치로 규정’하는 것이다.





전편에 나왔던 의리적 구토를 살펴보자


조선의 최초 연쇄극 의리적 구토 (1919.10.27)


감독 김도산
각본 김도산, 미야카와 소우노스케

제작 박승필
출연 김도산, 이경환, 김영덕, 윤화

촬영 미야카와 소우노스케

편집 미야카와 소우노스케

개봉 ?1919년 10월 27일
1966년부터 영화의 날로 제정·기념


제작 결과 및 민족 자본과 인력이 주축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한국 영화의 기점이 되었다.


그렇게 최초 조선 연쇄극, 기록영화, 계몽극영화가 탄생하였다.


당대 의리적 구토의 의의는 상술했듯

조선 자본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여 한국 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연쇄극으로서 연극과 영화를 병합한 극으로 조선 연쇄극 텍스트(*1)의 속성을 결정했다
또한 조선 영화 발전의 한단계 도약을 의미했기에 한국 영화의 기점이 되어 조선 연쇄극 붐을 일으켰다.

그리고 영화사적 의의로서는

극 형태를 지닌 최초의 조선영화
민족 자본 주도의 영화
조선인 배우들의 등장
초기 형태의 영화제작 시스템의 확립이며

첫째로는 조선에서 단순 영화 흥행의 단계에서
제작의 단계로 넘어가는 데 있어 가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

둘째로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뿐 아니라 제작주체의 측면에서
이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1)의리적 구토의 텍스트 속성 결정은 다음과 같다.

의리적 구토의 스타일은 에이도푸시콘으로




여기서 잠깐 에이도푸시콘이란?

-화가이자 무대 장식가인 필립 제임스 드 루테르부르가 1781년 만든 미니극장.
그림이 조명과 음악에 맞춰 바뀌는 일종의 이미지 관람장소-







특징으로는 야외 실사를 배경으로 탈 것 등장
실사 배경을 활용한 활극적 볼거리 연출
서양 사진을 지시해 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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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으로 따지자면 디즈니에서 구축한 ilm x 에픽 게임즈가 협업해서 만든 언리얼 세트장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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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연쇄극이 없어서 여기던 바, 한번 신파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명승지에 박아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10월상순부터 경성 내외 좋은 곳에서 촬영하여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개연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愛活家) 제씨(諸氏)는 한 번 보실만한 것이 올시다.


박은 곳(촬영장소)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영미교, 남대문정거장(서울역)
독도(뚝섬), 전관교, 전차, 기차, 자동차, 노량진, 공원기타

입장료:특등 1원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 단 군인, 학생은 반액

경성부 수은등 활동사진상설, 천활회사 특약(特約)
단성사 전화 959

조선신파 활동사진은 금고(今古)에서 처름

단성사주 박승필 근고(謹告)

오늘 10월27일 부터





의리적 구토는 신파활극의 전형으로

명금과 대조시켜 보면

절반으로 나눠진 금화 -아버지의 유산
악인과 팜파탈 설정 -계모와 일당
선인과 조력자 설정 -주인공 아들과 의형제
선과 악의 조직화 -계모의 음모와 아들의 응징
세계의 광대함(활극요소)<공통점>

이렇게 대치시킬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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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필: 조선 흥행계의 대부이자 민족 예술의 수호자
일제시기 대중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유일한 민족 흥행자본-이었다.

연쇄극으로 한국 최초 영화를 만든 단성사의 사장이었으며
1908년부터 광무대를 운영하며 전통 공연과 신파극을 무대에 올렸고
1918년 단성사 경영권을 인수한 다음 개축하여 조선인 상설 영화관을 개관

이후 단성사를 기반으로 서구영화를 소개하며 조선 영화 제작과 발전을 도모하였고
1923년 장화 홍련을 제작했고 자본과 제작진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감독: 박정현, 각본: 김영환, 촬영: 이필우
의리적 구토의 경우 각본 보조, 촬영, 편집에 일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총독부 활동사진반 -기록영화 제작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 동화의 목적으로 문화통치를 실시
1920년 4월 조선 총독부 관방 문서과에 활동사진반을 신설하여
시정선전, 동화정책, 사회교화 및 전쟁 동원등에 이용하기 위해 영화 제작 및 상영을 실시하였고

이는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과 활용에 대한 인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영화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프로파간다를 위한 기록 영화를 제작

1920년 활동사진반을 조직하여
시정상황을 영화로 기록하여 전국적인 상영과 홍보를 실시했다.

위생 홍보활동과 계몽활동으로
신파극과 위생영화를 동시에 상영했는데
생의 과(1922): 조선 최초의 위생영화로 조선 종두령이 소재였다.
(*2)월하의 맹서(1923): 저축 장려 계몽영화로 감독은 윤백남이다.

(*2) 의리적 구토는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 연극에서 열차 장면과 같은 특수한 구간을
영화로 일부 상영한 방식의 연쇄극이라 연극에 가깝다는 이유로 월하의 맹서를 한국 최초의 영화로 꼽는 주장도 있다.


계몽 극영화의 소개

경무국 위생홍보 영화 <인생의 악귀>(1920) 감독: 김소량
1919년 전국적으로 콜레라 유행: 위생 홍보영화 제막과 홍보

“위생과 방역계에서는 과반 지나(支那) 방면으 로부터 유전된 호열자병 만연에 대비키 위하야
활동사진 필님 2권에 ‘인생의 악귀’라 제하고 선인연예단 김소랑 일행에게 위촉시켰다.
이 활동사진 필님은 목하 각 군에 흥행시키는 중이다.”

경기도보 1920년 6월 6일


월하의 맹서: 조선 최초의 완전 극영화
제작 목적은 채신부 주도의 저축 장려의 계몽영화이다.

영화사적 의의로는 한국의 무성영화 시대를 개막하는 성격을 띄었으며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모두 필름 촬영으로 소화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한국인이 손수 만든 최초의 극영화이며
-감독 및 시나리오 집필: 윤백남-

여자 주인공 역할을 실제 여배우가 맡은 최초의 영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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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여배우 이월화(1904년 ~ 1933)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1920년대 추정, 2019 발견)
노동 장려 영화


부록: 윤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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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운동의 선구자인 윤백남


소설가, 극작가, 연극인, 영화감독, 매일신보 편집자였으며


1903~1909년 일본 유학

1912년 '문수성' 극단창단

1919년 조선 최초 대중소설 대도전 연재

1923년 월하의 맹서로 최초 감독과 각본가로 데뷔

1925년 백남 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여러 영화 제작및 감독을 하였으며

조선 영화인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백남 프로덕션은 1925년 "순 조선영화의 제작과 외화 수입"을 취지로 설립되어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주삼손, 남궁운, 김우연, 정기탁, 전창근, 김정숙 등을 등용했다.





3부 무성영화의 시대



조선 무성영화 시대는: 1923 ~ 1934년 까지로


당시의 영화 기반은 미서부 연속활극과 일본 신파극의 결합이었으며

영화주류는 일본 신파극의 전성시대였어


<신파 하면은 비극 억지 눈물짜내기 등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게 아니다.

바로 밑밑 문단에 등장하니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조선 무성영화의 고민은 다음과 같았다.

- 영화적(cinematic) 요소를 획득하는 방식

- 이야기 영상의 극화




미국 활극과 일본 신파의 결합임은 이미 이전 글에 상술했기고

활극에 대해서 설명했기에 신파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신파영화란?


현대 배경으로 한 현대적 소재를 다른 극영화로


신파극(新派劇)이란, 근현대 동양(특히 일본)에서 서양식 연극을 기반으로 만든 연극을 가리키던 말이다.

즉 일본의 기존 연극 문화인 가부키를 '구극(舊劇)', '구파(舊派)'이라 하고 서양 연극을 '신파'라고 했던 것이다.

1888년 즈음에 시작되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하였다.

나무위키 중에서



‘신파비극’, ‘신파활극’ 등을 명기

서구 멜로 드라마가 일본의 신파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수용되었다.


미국 멜로 드라마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선과 악의 갈등

선의 궁극적 승리

주요 유형: 남녀주인공과 악당

감정의 과장된 미학

판에 박힌 주인공 운명과 우연의 일치

모험으로 채워진 액션

극적 폭로와 과시적인 행동의 순간







D.W. 그리피스 영화의 활극성

국가의 탄생의 그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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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phans of the Storm


영화사를 다루려면 빼놓을 수 없는 그 이름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1875~ 1948)

클로즈업, 플래시백(회상), 짧은 쇼트들이 잘게 나뉜 편집, 교차편집 등
현대 영화의 다양한 연출 기법들이 본격적으로 영화에 나오기 시작한 기점이 된 영화인 국가의 탄생의 감독

미국 특히 그리피스 영화의 활극성인 긴장과 스릴, 대립과 갈등의 속도감, 이질적 양식 등은 조선인 관객의 열광적 호응을 불렀다.



일본 신파극은 1888년 일본에서 연극을 정치 프로파간다로 이용하면서 싹튼 양식으로

정치극, 시사 오락극에서 시작해서 가정 비극으로 정착된 일본의 흥행극으로

통속적인 가치관의 표상화, 상업주의, 감상주의 등으로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었고


이에 한국 신파 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변했다.


일본의 영향으로 신파 극단이 영화계에 유입되었고

성공한 연극들을 영화화 하여 멜로 비극<장한몽>이 대흥행하여

대중의 코드가 신파 비극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장르적 토대는 미국의 활극성을 기반으로 하였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온다


시대 분위기: 1920년대 일제 강점기 특유의 정서인 슬픔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파의 패배주의적 세계관과 감상성에서 연유되었다.


*예시

사랑과 배신의 아이콘이며 신파극의 대명사

<장한몽>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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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경손(1926년작)

주연: 김정숙, 심태식(심훈)

제작: 계림영화사

개봉: 단성사




당시 한국 신파의 특징

비극적(식민지배) 상황 속의 멜로드라마

근대화 경험과 싹트기 시작하는 자유연애




초기 무성 영화계에서 최초의 본격 활극 영화는 국경이 존재한다.


감독: 김도산, 원산만(일본인)

원작: 윤백남

제작: 단성사, 쇼치쿠, 신극좌

출연: 김도산, 신극좌,파단원



한국 최초의 (극영화)가 <국경>이라는 논쟁이 존재하는데


<김종원의 거주지 귀착설> 

원산만 일본인,일본인 영화제작임에도 불구하고 생활근거지가 한국이고, 소재나 관람

대상이 우리 문화와 정서와 맞게 기획되었다면 우리영화


<조희문의 광의적 한국영화론>
제작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문하고‘한국에서’ ‘한국인 관객’을 주대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모두 포함하는 광의적의미로 정리할 필요





이전편에 상술한 월하의 맹서와 같이 최초 극영화 논쟁이 존재한다.




논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국경: 상업자본 동원

단성사 유료상영 영화

근대적인 제작 배급 상영구조


월하의 맹서: 일제 자본의 정책영화

공공기관 무료상영



<조선 최초 상업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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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1923)


1912년 소설『옥중화』 토대로 제작,

한국인이 손수 만든 최초 영화, 기승전결 극영화로

조선인 관객을 전제로 제작했으며

기생표상과 남원이라는 이국적 풍경에 초점을 맞추었고

- 조선적’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들 최초 구축했다



이 영화가 가져온 조선 영화계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조선 무성영화 시기의 제작 구도도를 구축하여

일본인들의 한국 영화 제작이 속출했으며

일본인 흥행사의 자본과 기술 주도와 조선인의 자생적 움직임이라는

조선 무성영화 시기의 제작 구도도를 구축하였다.


두번째로 조선 흥행계 유일한 조선인 경영자였던 박승필 역시 단성사에 촬영부를 만들어

조선 영화인들의 손으로 만든 장화홍련전(1924)으로 맞불을 놓았고


세번째로는 조선영화의 시네마틱에 대한 화두를 제시했으며


네번째로 극장 자본이 주도한 영화 제작을 넘어 본격적인 영화사 설립을 추동했다.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1923)

백남 프로덕션(1925)

계림 영화협회(1925)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장편'극영화 장화 홍련전은 제작, 연출, 출연 그리고

중요한 성립 요건인 기술마저도 조선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이 영화로 최초의 조선인 촬영기사였던 이필우가 영화로 데뷔했으며

당시에 대 흥행을 이루었다.


이에 조선 영화계가 싹트자 일본 신파영화 제작사와 조선 영화인들이 협업을 하게 되는데


단성사의 박승필

동아문화협회(1919):하야카와 마쓰지로 대표작<춘향전>(1923)

조선키네마 주식회사(1923):영화 제작사로 처음 등장한 조직으로 초기 영화인들이 대거 합류(윤백남 포함)

백남 프로덕션(1925): 윤백남-조선 영화인 주축

계림 영화협회(1925):조일재-<장한몽>당대 조선이 제일 좋아하는 신파극을 제작




단성사 영화제작부는 여러번 설명했으니 생략하겠다.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는 당시 한국 영화 역사상 최대의 제작사로

1924년 무대예술연구회 유입과 회사 설립- 안종화, 이경손등

단성사와 특약을 맺었으며 <해의 비곡> 창립작, 감독: 왕필영(일본), 조연출: 이경손

1925년 <운영전> 흥행을 성공시켰다, 감독: 윤백남


그러나 설립후 1년만에 조선 영화인들의 탈퇴와 회사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경영진 또한 일본 상공인을 중심으로 의사, 변호사, 승려 등 각계 종사자를 주축으로

투자자가 형성되어 영화 관계자가 전무하여 제작사로서는 조직적이지 못한 불합리함을 잉태하고 있었으며

기술진은 전원 일본에서 초청된 자들로 채워졌었다.



백남 프로덕션 또한 상술했기에 간략히 설명하자면

1925년 연구생을 모집하였고 교육했고 백남의 일본 방문과 회사는 해체되었고

이후 백남에서 탈퇴한 영화인들이 모여 고려 키네마를 설립하였으며 설립자는 이경손이었다.




이후 조선 영화인 계보는 다음과 같다.


단성계(박승필)

- 이필우(최초의 촬영기사)

- 이구영(감독, 평론)


백남계(윤백남)

- 이경손(배우, 감독,평론): 고려키네마(1925) 이경손프로덕션(1926)

- 나운규(배우, 감독): 나운규프로덕션(1927)

- 심 훈(배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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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우: 한국 영화 기술의 개척자





1913년 우미관 영사기사

1914년 일본유학

1920년 <지기 知己> 촬영- 최초 한국인 촬영기사

1920년 최고 흥행신파 <장한몽> 촬영

1924년 단성사 촬영부 전속기사

- 우리 나라 최초 체육기록영화 <전선여자정구대회> 촬영

1924년<장화홍련전> 촬영·현상·편집

1925년 고려영화사 창립

1933년 PKR발성장치를 개발

- 1935년 우리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을 완성



초창기 한국 영화기술 분야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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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손:영화제작 선구자, 독립운동가, 조선인 최초의 카페 사장



1920년 연극활동과 무대예술연구회 조직

1924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기진으로 입사

- 1925년 윤백남 감독의 조감독/ 출연

1925년 윤백남 프로덕션 <심청전>(1925) 연출

1925년 『고려키네마』 창립 문예영화 <개척자>(1925) 감독

1926 계림영화사 창립

- 최고 흥행 신파영화 <장한몽> 연출

1926년 항일색채 영화소설 <백의인 白衣人>을 ≪조선일보≫에 연재

1928년『이경손프로덕션』창립, 카페 카카듀 설립

1931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를 위하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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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를 다루는 영화 밀정에도 나오는 카카듀 카페




시대적 배경과 영화 환경은 다음과 같다.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1926)의 제정


영화상영허가 사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도서실 주관으로 전국적으로 일원화


한국 영화를 검열하기 위해 제정한 법령으로

- 영사 제한ㆍ금지 명령권ㆍ극장 임검제 따위의 사전 검열 형식으로 통제했다.



제1조: 활동사진의 필름은 본령에 의해 검열을 거친 것이 아니면 이를 영사하여 다중의

관람에 제공할 수 없다


제3조: 검열관청은 검열할 필름을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다고 인정될 경 우

해당 필름에 제 1호 양식의 검인을 날인하여 설명대본에 제2호 양식에 따라 그

취지를 기재한다


제7조: 필름의 검열을 받고자 하는 자는 다음의 수수료를 검열관청에 납부해야 한다.



- 1920년대 중반, 조선영화 장(場)의 각축시대가 열리는데


조선 영화산업이 변화하면서

일본 제작사와 조선 영화인의 도제와 협업 시스템으로 약20여개의 영화사가 설립된다.


윗 링크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1926)이 제작한 아리랑의 성공으로 영화 창작의 자극제가 되었고


덕영프로덕션(1927)/ 대륙키네마프로덕션(1928)/ 경성촬영소 원산프로덕션(1930)

백남프로덕션(1925) / 계림영화협회(1925)/나운규프로덕션(1927)/ 이경손프로덕션(1929)등이 생겼다.




덩달아 상설관(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끼리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입장료, 상영작 경쟁등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관객에겐 호재로 작용했다.




거대화 되어가는 영화자본으로 인해

외화전문 토착 배급사가 설립되어

기신양행(1927): MGM과 파라마운틴과 특약을 맺고 영화배급권을,

덕영상회(1927): 워너브라더스, F.B.O사등의 영화배급권을 따낸다.


이로인해 영화문화가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조선영화가 제작된다


<아리랑>(1927)-수도없이 나오지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영화의 인기 상승과 질적 상승으로 인한 관람료 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상설관 끼리의 경쟁에 따라 내려가지만-


조선 무성 영화의 스타일이 구축되어 질적 향상을 이루었고


보다 깊은 고민인 영화촬영, 연기, 연출 등 영화자체의 본질이나 예술적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 전성기는 조선영화인들의 개성있는 미학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시기였다.



예시) 대표 영화인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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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손(1905~1977)

제작/감독/작가 

초기 영화인의 정신적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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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1898~ 1936) 

민족적 정서성향

변사/감독/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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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1902~1937, 함경북도 회령)

제작/감독/배우

근대영화사의 전설




조선 영화사는 윤백남, 이경손을 거쳐 나운규의 시대가 열리는데

신파화법를 넘어선 독창적 스타일을 개척했으며

조선 무성영화는 그가 제작한 <아리랑> 전후로 구분된다.



<무성 영화 시기 최고의 스타였던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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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이전에 독립운동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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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3.1운동에 참가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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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회선 파괴 음모사건(1921.03.16) 판결문


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 징역 2년, 나운규(羅雲奎, 20)

회령군 회령면 2동 26번지 징역 2년6개월, 윤봉춘(尹逢春,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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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비밀결사조직 도판부시절 나운규와 윤봉춘(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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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1902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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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청진형무소 2년만기 출소 사진



나운규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923년 지방 순회공연 <예림단>단원으로 시작


1924년 최초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

- 1924년 <해의 비곡>의 단역을 맡고

1925년 백남프로덕션에 입사하여

- 1925년 <운영전>(감독: 윤백남) 가마꾼으로 출연

- 1925년 <심청전>(감독: 이경손)의 심봉사 역을 맡고


이후 1926년 <아리랑> 감독 데뷔

- 조선 최고 영화인 위상을 얻게되며

이후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

- <아리랑>후속 제작 및 문예영화에 주력

- 발성영화 <아리랑 3>을 연출한다


이후 193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 최초의 영화인 장으로 단성사에서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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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중조>(1926) 이규설 감독



전편을 통하여 카페에 양안식과 공진삼이가 술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가장 우수한 장면이라 하겠으며 진삼이가 길에서 자전거에 부딪치며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치는 장면은 가장 유모어 한 재미있는 장면이라 하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멍덩한 중에 나운규군의 힘 있는 선굵은 연출만이

홀로히 뛰어나서 단조로운 스토리를 잘 조화하여서 가끔 웃기는 것이 저으기

성공이라 하겠다. 이 일편 만으로서도 나군이

얼마나 영화배우로서의 소질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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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1926) 각본과 감독

제작: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촬영과 현상: 이창용

편집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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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없는 나룻배(1932)
감독: 이규환

주연: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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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감독/각색 /주연: 나운규

제작사: 조선키네마 프로덕션
-제작비 1200원

개봉: 단성사(1926년10월1일) 
서울15개, 전국30여개 상영
1946년까지 서울 상영 800여회 상영

수상: 1940년대 초 ‘조선영화 최고작’으로 선정
전후 60년대까지 남북 공히 ‘민족영화’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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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니 양행 <아리랑>일본 전단지(1927)


내용 일부가 삭제된 상태이긴 하지만 일본에 수출되고 중국 동포사회와 일본의 조선인 노동 현장 가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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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3편> 조선중앙일보(1936)

- 토키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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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 <아리랑>을 촬영할 때에 내 자신은 전신이 열에 끓어오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아가 돈이 되거나 말거나 세상 사람이 좋다고 하건 말건
런 불순한 생각을 터럭 끝만큼이라도 없이 오직 내 정신과 역량을 다해
내 자신이 자랑거리가 될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 순정이 가득했을 뿐이외다.
그래서 이 한 편에는 자랑할 만한 우리의 조선 정서를 가득 담아 놓은 동시에 
동무들아 결코 결코 실망하지 말자’ 하는 것을 암시로라도 표현하려 애썼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었다.’ 민족성이라 할 수 있는
그 집단의 정신은 의로웠고 용맹했던 것이나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리랑고개’, 이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하는 일관한 정신을
거기 담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입니

『삼천리』 제7호, 1930년 7월 1일, 나운규


이후 나운규는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열어젖히는데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

- <풍운아>(1926)

- <사랑을 찾아서>(1928)

- <벙어리 삼룡>(1929)


등 27편의 영화에 참여했는데 그중 주연 21편, 연출 18편, 주연 및 감독 16편을 찍었다.



나운규 활동 구분은 3단계로 나뉜다.
1기 <아리랑>(1926) ~<벙어리 삼룡>(1929) 
2기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1930)~ 극단 생활(1934)
3기 <무화과>(1935)~ <오몽녀>(1937)

나운규의 영화의 스타일은 6가지로 나뉘는데

1. 서구 활극
2. 일본 신파
3. 유럽 예술영화
4. 독창적 스토리
5. 리얼리즘
6. 조선의 현실에 대한 상징과 비유

영향을 받은 유럽 예술 영화의 경우
소비에트몽타주와 독일표현주의로 대표된다.


예시

소비에트 몽타주
<전함 포템킨>(1925)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


독일표현주의


<칼리가리박사의 밀실>(1920)
감독: 로베르트 비네(1873~1938)

이렇게 식민지 무성영화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전통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 시대극
일본 신파 모방극
신파활극등으로 대표되는 조선 실천영화(예시는 계속 나오는: 아리랑)



<아리랑>에서는 조선 현실과 민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민족청년 영진과 반민족적인 인물 기호가 서로 대립하며
일제 식민지 자본가 계급의 폭압이 묘사된다.


아리랑의 3가지 속성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통속성: 신파영화, 빚과 가난, 여성희생 내러티브
외래성: 서부활극, 대립과 갈등 속 긴장과 스릴(속도감)
민족성: 조선서사: 전근대적 적폐와 ‘절망적 희망’


이렇게 니힐리즘적인 성격과 (복선, 리듬, 템포, 편집등) 연출력이 결합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아리랑의 의의 요약

한국영화 근대성의 기원
 저항민족주의와 예술리얼리즘
-조선인 만든 최초 조선 현실 반영한 영화
- 조선영화의 고유한 서사 획득
오락적 대중예술로서 대중과의 광범위한 소통과 공감
멜로드라마 장르효과를 자각적인 영화적 언어와 표현방법 개발
근대 미디어를 통해 탄생한 영화주제가 '아리랑'






<부록>

공산주의와 카프영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n)영화가 나왔는데


사회적 배경: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프롤레타리아 문학 ·예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카프의 출발은 당대 사회 문제에 대한 지식, 예술인들의 고민이었으며

1920말~1930초 카프, 해방후 영화 동맹을 중심으로 영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제에 맞게 해방전만 다룰거임 안그럼 정떡묻어서 북유게 가야함)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1925)

조선영화예술협회(1927)

- 이경손, 김을한, 안종화, 윤기정, 임화등 주축

김유영, 서광제 , 임화, 연구생의 주도권 장악, 서울 키노(1928) 설립

- 김유영의 <유랑> (1928) 제작, <혼가>(1929), <암로>(1929, 강호)

- 제2기 서울 키노(1930) ? 김유정, 서광제, 안석영등

- 제3기 서울키노(1931) ? 윤기정, 김남천, 임화등


 카프 기능

평론을 통한 정론적 예술비평이 중심

- 영화 이론과 평론계 주도

- 외국 영화에 대한 정보와 이론소개


『문예운동 文藝運動』(1926)을 발간하여 그들의 이념 전파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

-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심화

- 작가들이 창작을 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하려는 노력


총 5편의 영화제작

<유랑>(1928)< 암로>(1928), <혼가>(1931), <화륜><지하촌>(1931)



카프영화의 특징은
식민 프롤레탈리아 사회 건설+조선의 독립이며
- 좌,파적 시각에서 영화를 제작, 1928년 대중상업영화 극영화에서 출발


카프(영화)운동의 의의

영화 비평 담론에서 리얼리즘을 비평 방법론으로 제기하였고

영화의 계몽적 성격 주목, 계몽적 비평의 전통, 작품의 공리적 성격을 부각했다.














상술한 아리랑과 비견되는 작품이 있으니 이는 바로 <임자없는 나룻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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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없는 나룻배>


감독: 이규환(1932)

주연: 나운규, 문예봉, 김연실

개봉: 단성사


대표적인 사실주의 영화로


나운규 <아리랑>이 행동적, 민중적 저항의식을 대변한다면

이규환<임자없는 나룻배>는 서정적이면서 향토적인 저항의식을 대변한다.



유리 원판 필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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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표현’으로 의심받은 <임자없는 나룻배>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 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치 단순한 스토리로 그만치 성공한 것은 감독, 촬영, 연기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운규가 주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 민족이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로 볼 때 비로소 그 감격이 커지는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일을 빼앗기고 아내를 빼앗기고 또다시 생명의 줄과 딸을 빼앗기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거기 대항할 아무런 복안도 없이 오직 신명께 기도나 올리고 있는 춘삼이 그것은 곧 조선 민족의 한 전형이다.

(중략) 조선인으로는 한 번 보지 않으면 안 될 사진이다.


동아일보, 1932, 9, 14


「임자 없는 나룻배」! 여러 가지 조선 영화에서 가장 시적 표현인 제목이다. (중략)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일관하여 있다.

농촌 생활에 파경을 당한 자의 막연한 상경은 늘 이러한 비극을 지어내기 쉬운 것이다.

생계를 잃어버린 농군들의 도시 진출, 거기에는 항상 빈곤과 도회적 유혹이 쫓아다닌다.

이 빈곤과 유혹 사이에 끼여 싸우는 자, 또 이러한 비극을 빚어내는 자, 어찌 춘삼의 아내뿐이랴. 

(중략) 이 작품을 가리켜 조선 현실을 잘 표현한 온건한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매일신보』 1932년 9월







시각적 상징성(로컬적 담론)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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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표상과 전지 체제의 수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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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비되는 조선 민족의 현실을 나타냈다.



흥행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이규환의 연출력

2. 현실적인 내용

3. 대배우 명연기




대배우 무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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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1930년대 은막의 여왕 ‘문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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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봉 (191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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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없는 나룻배>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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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1936)

한국 영화 중에서 필름이 존재하는 세 번째로 오래된 영화이자
유성영화 중에서는 필름이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

교통사고예방 계몽영화, 근대화 여성의 일탈,
후회를 통한 고전적 가치관으로의 참회(당시엔 그게 트렌드였고 먹혔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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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최고(最古)였던 무성영화<청춘의 십자로>



개봉: 1934 
감독: 안종화
출연 : 이원용, 신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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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화
1902~1966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
 1924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전속 배우로 입사
 1927 조선영화예술협회를 발족
 1937 조선영화인협회 창설, 회장 역임
- 카프계열 신인 영화인들 배출에 주력
- 1930년대까지 13편 영화 감독
- 친일활동
 1945이후 연극 연출가 활동
 1948 정부관련 영화활동






4부

모던시대와 한국영화는 두가지 시기로 나뉘어


1. 1930년대~1940년대 발성영화 시대

2. 1940년대~1945년 해방까지 전시체제 조선영화


1930년대 이후 영화계는 대격변을 맞이하는데


토키시대, 전시체제, 2세대 영화인의 등장


즉 유성영화, 37년 중일전쟁, 일본 유학파의 등장이야.



발성영화 시대 (1935~1940)


발성영화 시대 도래: 1920년대 후반 이후


최초 장편 유성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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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g yet!"

감독: 앨런 크로슬랜드

제작: 워너브라더스

제1회 아카데미(1929) 각색상 노미네이트




디포레스트 포노필름(DeForest Phonofilm)

'라디오의 아버지’, 최초의 삼극진공관 ‘오디온(Audion)’ 발명(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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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드 포레스트 (Lee de Forest, 1873~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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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말하는 사진’의 첫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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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포레스트 단편영화 상영 광고(미국, 1925)



1. 1926년 2월 말 조선에서 발성영화 첫 시연
영화: 리 드 포레스트 단편 16종 상영
상영관: 우미관
2. ‘말하는 활동사진’의 담론
대중적인 오락장르
서구 근대를 상징하는 ‘과학’으로 담론화
- 청각적 기록성


1930년 이후 경성 영화상설관의 발성극영화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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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27일 조선일보


1. 주도: 조선극장(발성영화 중심)

단성사(무성영화 중심)

2. 배급사: 기신양행, 동양영화사

3. 발성영화 상영방식: 변사

- 1930년 이후 부터 발성영화시스템의 대극장전환


=>식민지 조선의 발성영화 제작 시도와 기술기반



조선영화 부흥 ? 발성 영화


1: 조선인 극장가에서 서구 토키 상영

2: 서구 토키 영화 흥행

3: 조선인 관객의 토키영화 외면
4: 선진기술력의 2세대 영화인들 등장

5: 서구영화 상영 제한


이 다섯가지 조건에 조선영화 부흥의 기회가 되었고

1926년 ‘활동사진팔름검열규칙’
-영화텍스트 통제의 표준화, 중앙집중적 관리


1934년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통제
-1937년 방화 50% 이상 상영 규정등

외국영화상영규제는 조선영화 부흥의 기회가 되었는데
일종의 스크린 쿼터제와 같아, 수요는 늘 있는데 공급은 우리만 할 수 있었고
저 검열만 뚫으면 어떤 영화라도 올릴 수 있었으니까.

이에 부흥을 위해 토키 영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나운규와 이필우의 조선 최초의 토키 영화 착수 <말못할 사정>(1930년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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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할 사정>

제작사: 원방각사

제작 및 기획: 나운규, 이필우



출연 춘사 나운규, 석금성, 심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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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성영화 <춘향전>과 촬영기사 이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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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우(1897 ~ 1978): 한국 최초 촬영 기사


일본과 중국등에서 사운드 연구

1: Vitaphone(sound-on-disc)방식 연구

- <말 못할 사정> 감독: 나운규

2: Movitone(sound-on-film)의 녹음기술을 연구
3: P.K.R 발성장치 개발
- P는 Pil-woo Lee, K는 Korea, R은 Radio

1935년 <춘향전>
조선인 기술진 주도 하에 사운드 기술 토착화



이필우와 P?K?R식 발성장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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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성영화 <춘향전> 의의 ? 조선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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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1935)

감독, 촬영: 이명우
녹음, 조명: 이필우
제작/기획: 와케시마 슈지로
제작사: 경성촬영소
개봉: 단성사
음악: 홍난파
출연: 문예봉, 한일송등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4가지가 존재한다.

영화 시스템의 변혁
- 토키영화에 상응하는 시스템(제작/상영) 구축
- 현상소와 녹음실을 갖춘 스튜디오설립
- 영화계 세대 교체
거대 제작사 설립
- 제작사 기업화
- 프로듀서 역할 부상
영화표현 극대화
청각 몽타쥬 활용
- 지방색과 언어를 바탕으로 내셔널한 표정연기
배우활동의 변화
- 더이상 외모만으로 연기할 수 없음

<춘향전>
기술, 자본주의, 그리고 ‘조선적인 것’


식민지 조선 최고 발성 극영화 <미몽>(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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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


감독: 양주만
제작: 와케시마 슈지로
제작사: 경성촬영소
녹음: 이필우
출연: 문예봉, 이금룡, 김인규등


식민지 조선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으로 해석하자면

소비지향적이고 근대적인 공간으로서 도시 상정
- 교통영화’ 표방(근대 문물과 생활상에 대한 시각 자료)

근대시기 젠더 갈등의 형상화
-모던걸의 가출을 모티프로 한 영화
-남녀 위계질서를 지키고 가부장제를 존속

전근대적 미덕과 근대적 악덕을 대조적 형상화
-식민 권력의 사상적 기획 속에 놓인 하나의 텍스트

<미몽> 미학적 전략: 현대극 최초 동시녹음

화면구도, 몽타주, 부감쇼트, 사운드 활용과 편집



토키 영화를 필두로 조선 영화계애 활기를 띄는데
영화제작사의 이야기를 해보자

경성촬영소: 조선 영화계로, 토키를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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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경성부 본정 3정목에 공식 설립
소유주: 와케시마 슈지로
설립 주체: 이필우, 박제행, 김소봉(일본인)

1930년대부터 조선영화 제작의 한 축
- 조선영화의 제작 상승과 기술적인 진보와 혁신
경성촬영소(1934~1940)
- 최초 발성영화를 제작한 노하우를 간직
조선인과 일본인의 협업시스템 유일


어라? 조선인과 일본인의 협업? 오래 못갈거 같은데?

아니 고려영화협회한테 제작부서로 합병당하기 전까진 오래감


경성촬영소 연표
1930~1933 활동
1934년 경성촬영소 발족
1938년 고려영화협회와 동양극장 공동 인수
1940년 고려영화협회의 제작부서로 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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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속편>(1936)의 동시녹음 현장

당시 조선 최대 규모였던 경성쵤영소는

일본의 니카스, 쇼치쿠社가 모델이었으며
크기는 극장 1개가 들어갈 정도였고
시설은 최첨단 방음장치와 무대(분장실!)이 존재했을 뿐더러
시스템은 체계화와 분업화를 표방했다.

경성촬영소 제작 인력과 역할: 조선과 일본의 협업


연도 작품 제작 감독 촬영 조명 편집/현상 녹음 1934 전과자 와케지마 김소봉(일) 이필우 최진 이필우(현)
1935 대도전 와케지마

김소봉(일)

이필우 최진 이필우(편, 현)

1935 홍길동전 와케지마 김소봉(일)
이명우(조)
이필우
이필우
1935 춘향전  와케지마 이명우 이명우 이필우 이웅(편) 홍난파(음) 1935 아리랑고개  와케지마 이명우 이명우
이명우(편, 현) 
1936 장화홍련전 와케지마 홍개명 이명우 최진 이명우(편, 현)
1936 홍길동전 와케지마 이명우 이명우 최진 이명우(현)
1936 미몽 와케지마 양주남 이필우 박용

양주남(편)

황운조(현)


1937 오몽녀 와케지마 나운규 이명우 최진

이명우(편)

이필우(현)



경성촬영소 제작 영화



연도 제작사 제작 작품 감독 1934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전과자 김소봉 1935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대도전 김소봉 1935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홍길동전 김소봉, 이명우 1935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춘향전 이명우 1935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아리랑고개 홍개명 1936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장화홍련전 홍개명 1936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홍길동전(후) 이명우 1936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미몽 양주남 1937 경성촬영소 와케지마 슈지로 오몽녀 나운규



저기 계속 나오는 와케지마 슈지로가 누구냐고?
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자 야쿠자 두목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ㅎㄷㄷ


그러나 어쩌겠어 엔터계는 유흥업에서 파생되어서 근현대까지 조폭들이 관리했던걸



경성촬영소 제작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아

1: 무성영화의 경우는 활극적 요소
2: 발성영화의 경우는 고전소설의 활용(대사와 감정선이 중요하니까)
-검증된 고전이 중요한거지 현대에도 검증된 소설 원작들의 영화화는 잦잖아?-
3: 양주남, 나운규같은 거장의 시기는 문학성과 실험성 강조



경성촬영소의 영화사적 의의는-조선 영화의 새로운 도약이야

최초의 발성영화 제작은 무성영화의 도약시점에서 발성영화 투자를
변화하는 관객의 욕구와 당대 현실을 관찰하여 관객과의 소통을
극장 인프라와 숙련된 스텝진용 구축을 통해 영화적 욕구실천을
영화의 완성도를 제고한 다양한 쟝르로의 영화화 모색을
기술적인 진보와 혁신을 통해 조선 영화의 새로운 미래 제안을 했지


그럼 조선인 자본의 영화사는 없었나요? 물론 있지! 바로 다음과 같아

조선인 자본의 ‘한양 영화사’

설립: 1934년 ~ 1937년(1차)
1938년 ~ 1940년(2차)
설립자: 나운규
투자자: 차상은


조선 영화인들의 고군분투의 사례
최신 설비 구축과 발성영화 제작
스튜디오 시스템 운영
- 배우들의 전속 계약 추진, 인적 체제와 운영 체계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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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주식회사(1937~1942)
이 글을 보면 해산된 해에 똑같은 이름의 어용 단체가 설립되는 부관참시를 당한듯 해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1942~1945)와 헷갈리지 않게 주의
설립자 최남주(1905~?): 조선적 정서의 세계화

우리에게만 있을 수 있는 고유한 것을 즉 조선의 정서를 나타내는 것을 제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향토색이라든가 그 정조(情調. 어떤 사물에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나 정취)를
무르녹게 묘사만 잘하면 세계 영화시장에 진출할 희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1936 '조선영화의 생명선’ - 최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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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1938)

감독: 박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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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1938)

감독: 이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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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1940)

감독: 김유영



조선영화를 선도한 ‘고려영화협회’ 혹은 고려영화주식회사


조선영화 촬영, 제작, 배급을 선도한 제작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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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는 이창용(1907~ 1961)으로 - 유일한 조선의 프로듀서

경성촬영소를 인수하고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영화제작사로 부상을 도모
- 동아시아적 영화 배급망을 설립?주도?확장하려는 프로듀서로서의 야심
야심찬 계획 내에서 영화의 지적?물적?인적 토대 구축
- 스태프를 통해 본 제작 시스템과 촬영소 운영 전략
- 연극영화계의 상호 공조
- 이후 <사랑에 울고 돈에 울고><복지만리><수업료><집 없는 천사>등 수작들을 제작했어

제작 인력과 역할은 다음과 같아

이창용= 기능 확대와 역할 다변화



작품 제작 감독 작가 촬영 조명 편집 1939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이창용,

동양극장

이명우 원작 임선규 최순흥 유장산 이명우(편집)
유장산(현상) 1940 수업료 이창용 최인규 야기 야스타로 이명우 최진 양주남 편집
경성현상소 현상 1941 집 없는 천사 이창용

최인규

방한준

니시가메모토사 가나이 세이치 최진 이익 편집
경성현상소 현상 1941 복지만리 이창용 전창근 전창근 이명우 최진 전창근 편집
경성현상소 현상 1942 풍년가 최인규* 방한준
김학성 정경준 양주남 편집
극동현상소 현상


*: 일본유학파 2세대영화인 활약

그러나 일제는 1942년 9월 전쟁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어용단체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하여,
기존의 모든 영화제작단체와 회사들을 통합, 재산몰수 등의 방법으로 강제 해산시켰고.

그러나 고려영화협회는 이 통합에 반대하고 스스로 탈퇴함으로써 해산되었어

1937년 영화계 양대산맥은 조영과 고영이었어

조선영화주식회사(조영) 고려영화주식회사(고영)





5부 조선영화 혹은 "반도영화"와 전시체제의 조선영화(1940년대~해방전)


‘반도영화‘란?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로서 조선의 향토색이 짙은 영화를 지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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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1937)
감독: 이규한
출연: 문예봉, 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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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1938) 감독: 방한준(1906~1950)




<어화>(1939) 감독: 안철영(1909~ ?)



반도영화의 특징은

1: 향토색을 화두로 하여 조선영화의 예술적 지향과 싱업적 판로의 개척
2: 극영화와 기록영화 사이에서 사실주의적인 양식 “반실사작품“
3: 조선영화의 '리리시즘 (lyricism)'의 재론
-"영화를 하나의 예술적 대상으로 자각하는", 즉 감정과 대상을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각을 제시했어





2세대 조선영화인으로의 세대교체

<1세대>:윤백남, 이경손, 나운규


일본 영화촬영소 유학파 
<2세대>:이규환, 방한준, 박기채, 윤봉춘등

발성영화로의 스타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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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은 바로 이규환이야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라고 할 수 있지

상술한 1932<임자 없는 나룻배>의 감독이면서
또한 상술한 반도영화 <나그네>의 감독이야(조선 최고 토키영화이면서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했어)
1938 <군용열차> 기획, 원작, 각색을 맡았고
1974년까지 총 23편의 영화를 제작했지












전시체제의 조선영화
- 1940년대~해방전까지

 1920?30년대 영화통제정책과 관람환경은 다음과 같았어
1) 영화의 도입과 상영장의 통제 
-1:1917 조선총독부 도서과에서 활동사진 흥행물 단속: 조선인 집단행동차단

2) 1920년대 검열체계의 도입과 대중적 영향력 확대
-성격-
식민 통치에 방해가 되는 영화 제작과 상영 통제
식민 통치를 위한 선전영화
-1: 1920 조선총독부 활동사진반 설치 
-2: 1922년 이후 흥행장 및 흥행 취체규칙의 시행
-3: 1926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시행: 대본과 필름 검열

3) 1930년대 영화배급 통제와 관람환경 변화
-1: 1934 활동영화취체규칙시행: 검열이후 상황과 흥행장 통제


전시체제 전환과 조선영화령 시행

1) 전제체제 전환과 언론통제
-1: ‘총동원 체제’는 전쟁 수행을 궁극적 목표: 모든 분야 유기적 통합과 조정
-2: 내선일체에 입각한 조선 언론 기관 종합적 통제

2) 1940 조선영화령 시행과 신체제
-1: 영화 법적제도, 인적조직, 제작-배급-상영 체계에 통제 강화
-2: 영화를 계몽과 선전에 유익한 도구로 활용- 국책영화 제작
-3: 조선영화인 협회’(1939) 발족
-4: 영화신체제
-’조선영화주식회사’(1942) 발족: 민간 주도 영화사 병합 및 폐쇄(내가 말한 부관참시가 바로 이거야!)
- 민간 주도 영화사 병합 및 폐쇄
- ‘문화영화’제작


친일/국책영화개념의 등장
1) 친일 영화
-1: 내용: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영화
-2: 시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7년 이후로 제한
-3: 제작 문제: 중국 흔들림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대안으로 ,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화기도
-4: 친일과 국책 구분 : 친일영화는 대동아 공영권의 전쟁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식민화를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영화로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2) 확장과 혼용된 용어 
-1: 군국주의 어용영화 : 군국주의 영화란 한마디로 군사력에 의하여 국위를 나타내는 정부정책에
동조하고 이를 위해 계몽 설파하는 목적영화
-2: 국책영화 :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전시 동원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 시책의 영화 지칭
역사적 가치판단 배제
-3: 어용영화 : 영화예술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져버리고 그 시대의 권력가나 기관에 아부하여 그의
정책에 공명하는 영화.
‘친일영화’는 스스로 일제 정책에 순응하여 협조하는 영화, ‘국책영화’는 권력기관이
추구하는 정책을 계몽하기 위해 기관이 직접 제작한 영화
-4: 합작 선전영화 : 일제의 정책선전을 식민지 주민에게 주입하기 위해 합작 형태로 식민지의 인력과
자본을 동원하여 제작된 영화



확장된 용어는 다음과 같아
친일영화: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대동아 공영권의전쟁동원과 내선일체의
황국식민화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낸 영화

국책영화:
1: 식민지 치하와 유신체제기를 포함한 강압적 독재권력의 통치기에 국가정책과 정권의 홍보 목적으로 국가
기관의 지원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거나 간접적인 지원을받고 유통된 영화

2: 한국영화사에서 문화영화와 국가 직접 제작 영화이거나 국영화된 회사에서 제작한 영화


국책영화의 기원으로서 문화영화
1) 문화영화 : 쿨투르필름(Kulturfilm)
1930년대 일본에서 도입, 우파 영화, 교육, 계몽 영화, 전쟁 기록영화, 과학 영화, 민족 영화등
기록영화를 통칭, 이데올로기 전파와 국민 통합 목적

2) 위생영화 :
독일의 공중 위생 정책의 핵심인 건강관리와 위생을 합하여 위생으로 번역. 국가가 일반 국민 건강과
위생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
- <월하의 맹서>는 체신국에서 우편 저금 장려용 영화(1923)

3) 뉴스 영화: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시 상황에 돌입한 뒤 영화의 선전-계몽 역할이 더
욱 강화됨에 따라 정책, 산업 양면에서 뉴스영화의 비중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친일 국책영화의 이데올로기: 전체주의 천황제 파시즘

-1: 천황제 가족주의와 대동아 공영권
천황에 대한 충성/황국 전사의 우상화/일선동조론, 일본어 사용 
-2: 지원병 제도와 징병제 홍보
조선인 지원병 촉구/강제 징용 수용
-3: 내선 결혼 장려와 총후 부인 이미지
총후부인이란 '남자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난 뒤 후방의 일을 내조로써 책임지는 부인'을 말한다.



일제의 권력의지와 지배 담론은 다음과 같아

국책 영화전략으로

1: 전시상황에 대한 내면화
2: 조선의 문화요소 차용을 통한 순치화
3: 제국 구성원의 가족화
4: 죽음의 미학화

4번같은 짓을 하니까 인명경시 풍조가 나온거고



국책영화의 명암은 뚜렷해

제작 위축과 표현 자유 제한
식민지 관객을 교화 대상으로, 영화는 프로파간다 수단으로의 전락
자생적 한국영화 산업 성장으로의 저해
동아시아 시장과 영화 기업화 시도-유일한 명?-
국가 주도형 영화는 이후 한국 독재시대의 국책영화로 이어짐

5개중 4개가 암담하네


당시의 친일 국책영화의 예시

<군용열차>(1938): 친일 국책 영화의 신호탄

감독: 서광제/원작: 이규환/ 제작: 성봉영화원, 도호영화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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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의 결사대>(1943)

기획: 최인규
제작: 고려영화협회. 동보영화주식회사
감독: 이마이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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