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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삼나.. | 25/01/01 21:34 | 추천 7 | 조회 35

[자작유머] 스포) 영화 그린 나이트 후기. +35 [9]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9016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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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가웨인과 녹색 기사 이야기를 대충 들어본 적이 있어서 뭐 비슷하게 흘러가겠지~ 싶었는데

줄거리는 대동소이하지만 연출이랑 캐릭터를 독특하게 비틀어놨고 마지막 결말에서는 원전을 아예 비틀어버림



2.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요약하면 '주었으면 받아야 한다, 받았다면 주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는 무언가의 주고 받음으로 시작되고 끝났음



늙은 왕은 가웨인에게 자신 옆의 자리를 '주며' 그만의 이야기를 '달라고 함'


녹색 기사는 자신의 몸을 자른 이에게 명예를 '선사하는' 대신

1년 후 그 자의 신체를 똑같이 '가져가겠다' 선언함


여정의 출발에서 만난 어린 강도는 가웨인에게 길을 알려주며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충분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자 숲에서 그를 린치하며 강제로 대가를 '가져감'


아예 성주와 그 부인을 만나는 장의 제목은 '획득물 교환' 이었고


영주는 사냥물과 안에서 받았던 아내와의 정분(입맞춤)을 바꿔 가져갔으며

부인은 가웨인의 정을 얻자 마법의 녹색 허리띠를 선사해줌



획득물 교환에서 성주와 가웨인이 나눴던 대화도 약간 거칠게 요약을 하면

"안락하고 겁에 질린 지금의 태도를 가지고 명예까지 덤으로 얻으려 하느냐?" 라서


집을 떠나 고난을 겪고, 여태까지의 자신을 버리는 대신 진정한 용기를 얻는 가웨인의 여정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라 생각함



3.

가웨인은 막연히 자신이 원탁의 전설들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랬지만,


막상 그런 심리로 나선 녹색 기사와의 게임에서도 계속해서 주저하고 단칼에 달려들지 못했으며

목을 베고 자신을 주제로 한 인형극까지 생겼음에도 하루하루를 술집에서 보내며 삶을 낭비했음


일반적인 기사 문학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과는 대비되는, 명예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바라나
어떤 쪽으로는 수동적이며 방탕하고, 어떤 쪽으로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공포와 집착을 가진 모습인데

그런 인간적인 주인공이 영웅적 서사의 위를 따라가며 새롭게 변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라고 초반에는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이 생각도 묘하게 바뀌더라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여정에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시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극중에서 가웨인이 겪는 일들은 영웅적 서사와 거리가 먼 듯한 모습도 상당히 자주 나옴


오프닝에선 왕이 된 가웨인의 모습이 불타오르며 없어지고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준다던 허리띠는 별 의미 없이 도둑에게 빼앗기며

성주의 부인은 허리띠를 갈구하다 사정까지 해버린 그를 기사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비웃고

약속의 순간 가웨인은 몇 번씩이나 겁을 먹고 유예를 부탁하며 스스로의 목숨에 집착함



원본 이야기를 존중하면서도 계속해서 해부했던 영화의 전개를 생각하면 이 느낌을

'탐욕스럽고 헛된 명예로 찬 길을 걸어갔음에도 최후엔 숭고한 결말을 맞았다' 라고 해석해야 할지...


그리고 이 점은 결말에서도 계속해서 숙고할 주제가 되는데 이건 후술.



4.

근데 일단 위의 내용은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라는 거고 영화 자체가 대놓고 '그런가... 알려주지 않겠다' 하는 톤으로

온갖 환상, 상징들과 모호하고 긴 호흡의 장면들을 섞어놔서 보다가 졸려 뒤질뻔함


대사도 은유가 많아서 눈이 서서히 감기면서도 'ㅅㅂ 이거 졸면 바로 이해 못할텐데' 하는 생각으로 버팀


내가 여태껏 눈 뒤집혀가면서 본 영화가 타르콥스키 감독 작품들밖에 없었는데...

그 졸리다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도 멀쩡했는데... 진짜 보다 으어어ㅓㅓ어 하면서 깼음



5.

논쟁의 마지막 대사.


"Well done, my brave knight. Now... off with your head."



처음 봤을 때는 "죽음을 직시하고 용기를 냈구나, 나는 그대의 목을 베지 않겠다" 의 어조로 봤는데

리뷰를 위해서 전후 장면을 계속 돌려보다 보니 해석이 정반대로 바뀜



나는 녹색의 기사가 가웨인의 목을 벤 것이 맞다고 생각함



원전에서는 가웨인의 삶에 대한 열망을 보고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는 결말이 맞지만,

3번에서 말했듯 원본을 여러 방식으로 재창조한 시점에서 똑같은 해석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 같음



가웨인의 이 여정은 애초에 '목을 베인다는 운명이 정해진 여정'임


계속해서 술집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도, 주저하며 방황한 것도, 마지막의 백일몽도

모두 자신이 직접 결정지은 결말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지려 하는 과정이었음


가웨인은 생명과 땅의 색이기도 한 녹색을 부패의 색이기도 하다고 부정하며

버섯을 먹고 손이 이끼로 뒤덮이는 환상을 보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녹색 숲, 녹색 공간에서 도망침


하지만 성주의 부인은 "인간의 붉은 욕망이 죽는 순간, 녹색은 그걸 덮으며 다시 자연의 총천연색 빛깔로 돌려놓는다."

라고 도리어 부패의 색이란 의견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도피를 선택하는 가웨인을 조용히 질책함



이 부인의 비유는 어떻게든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모습에 대한 조소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인 결말을 앞에 두었을 때 겸허함과 용기를 가지라는 격려와 응원이기도 함


가웨인은 마지막까지 못 하겠다며 울음을 터트리다 끝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환상까지 보지만

결국 그 환상의 마지막에서도 허리띠를 풀고서 늦었지만 맞이했어야 할 죽음을 받아들임



그렇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닌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설명이 되고,

모든 집착을 떠나보내고 품위있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는 사람에 대한 찬가로 완성된다



때문에 녹색의 기사는 비록 처음엔 찌질하고 겁에 질린 어린 청년이었을지언정,

마지막까지 허리띠를 차고 도망쳤던 원본의 가웨인보다도 훨씬 위대해진 영화의 가웨인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담아 눈물을 닦아주고 작별을 고했다... 고 해석했음





진짜 이렇게까지 리뷰 쓰는 데 골머리를 썩힌 영화는 처음이다...

그래도 고찰해볼만한 것도 많고 만듦새가 아주 훌륭해서 후회는 없음


개인적인 평점은 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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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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