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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 24/12/04 23:12 | 추천 9 | 조회 5

[자작유머] 유게 정상화를 위해 이런거 준비했는데 +5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868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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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의 잉굴다이

 

 


한국인이라면, 여기에 더해 병자호란에 관련한 사극에 관심이 많다면 용골대(龍骨大)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비단 사극이 아니더라도, 교육과정중 문학 수업 시간에 박씨전과 같은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를 했다면 그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용골대는 조선에서 청의 내정 관료이자 무장이며, 동시에 외교 책임자이기까지 했던 잉굴다이(Ingg?ldai)의 이름을 조선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후금/청측의 한문으로는 영아이대(英俄爾岱)라고 표기하지만, 조선에서는 그의 이름을 용골대라고 서술하여 그 기록에 남긴 것이다.


잉굴다이는 청말의 이홍장이나 원세개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청의 관료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청관계의 태동, 수립기에 청의 입장서 막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국가 내에서 단순히 외교적인 역할만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때로는 호부승정 또는 상서로서 청의 내정관료로 자신의 군주 홍타이지 또는 순치제, 도르곤을 보필했으며 때로는 무장으로서 적과의 전투 일선에 서서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본 글에서 잉굴다이의 자세한 행적을 서술코자 하지는 않는다.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저 단 한 가지다. 필자는 여기서 잉굴다이의 팔기(八旗)내 소속기가 무엇이었는지, 과연 익히 알려진대로 정백기(正白旗)의 소속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고 있었는지를 짧고 간단하게 서술코자 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잉굴다이는 여러 사료상에서 정백기에 예속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팔기만주씨족통보, 흠정 팔기통지 모두 잉굴다이를 정백기의 소속으로 기술한다. 나아가 팔기통지의 전기 서술을 이어나가는 청사고나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1644-1912) 에서도 잉굴다이는 정백기에서 소속이 변한 흔적이 없다.1


이러한 논조를 계승하듯 현재 잉굴다이에 대해 언급하는 논문이나 서적들 역시도 그를 일관적으로 정백기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터넷의 여러 문서들 역시도 잉굴다이에 대해 한결같이 정백기에 예속된 인물이라고 서술한다. 


사료들을 추합해 보건대 잉굴다이가 정백기였음은 확실하다. 최소한 '청조가 입관한 뒤, 본인이 죽을 당시까지는' 정백기 소속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즉슨 누르하치 치세 시기나 홍타이지 치세 시기에도 잉굴다이가 정백기였는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필요가 존재한다. 잉굴다이가 소속된 정백기는 후금~청초 시기 특히나 기색(旗色)이 자주 변동된 구사(gvsa, 旗)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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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의 잉굴다이

 


잉굴다이의 소속기인 정백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누르하치 시기서부터 살펴보자. 순치제 시기의 정백기는 본래 누르하치 통치 하 후금 시기에는 정황기(正黃旗)였다. 정황기는 1626년 누르하치 사후 홍타이지의 조치에 따라 양백기(?白旗)로 개칭되었다. 이는 홍타이지가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양백기(兩白旗, 양백기와 정백기)와 양황기(兩黃旗, 양황기와 정백기)의 기색을 맞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 홍타이지 치세 당시 양백기의 소유 버일러는 누르하치의 마지막 대푸진, 울라나라 아바하이 소생의 형제, 도르곤과 아지거로 고정되었다.2 


그러다가 1643년 홍타이지가 사망한 뒤, 순치제가 옹립된 상황에서 청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 나가던 도르곤은 자신의 친동생이자 정백기의 버일러였던 도도와 대학사 범문정간에 존재했던 스캔들을 이유로 삼아 양(兩)백기의 버일러 지배 구조에 손을 댔다. 도르곤은 범문정의 처를 겁탈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도도에 대한 처벌을 단행, 기존에 도도가 소유하고 있던 니루들 중 15개를 몰수하여 자신의 아래로 돌렸다. 


도르곤은 본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니루와 도도로부터 몰수한 니루를 합쳐 신(新) 정백기를 구성했다. 나아가 본래 자신과 함께 양백기를 통치하고 있던 아지거와 도도의 니루를 합치고 신(新) 양백기를 형성, 두 사람이 양백기를 통치하게끔 했다. 도르곤은 그로서 온전한 한 구사의 버일러가 되었다. 이렇게 탄생된 신 정백기는 이후 잉굴다이가 죽을 때 까지 도르곤의 아래에 존재했다.3


이러한 정백기의 변화 과정을 모토로, 잉굴다이가 누르하치 시기에 정황기 소속이었으며, 이후 홍타이지 시기 정황기가 개칭되어 양백기가 됨에 따라 양백기 소속으로 바뀌었고, 홍타이지 사후에는 다시 양백기가 정백기로 개칭되면서 정백기 소속으로 바뀌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소속기명은 정황기->양백기->정백기 인 것이다. 이후 잉굴다이의 기속이 팔기통지와 팔기만주씨족통보, 청사고에 정백기라고 기술된 것은 그의 소속기의 마지막 기명(旗名)을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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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칼부림>의 잉굴다이

 


그러나 잉굴다이가 중간에 다른 구사에서 정백기로 전출을 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특정 인물의 소속 구사가 완전히 바뀌는 경우도 왕왕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잉굴다이가 정백기(구 양백기, 본 정황기)에 쭉 눌러 앉아 있던 인물이 아닐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 뿐이 아니라 그가 본래 도도의 정백기 아래에 존재했다가 도르곤의 도도 처벌 이후 도르곤의 산하로 바뀌었을 가능성 역시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상의 논지를 증명하는 연구 결과는 여럿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마쓰이 칸야의 「?初ニル類別考」를 들 수 있는데 해당 논저는 천총 8~9년의 전관 니루 보유자에 대한 분석표를 수록했으며 여기서 잉굴다이는 양백기 소속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두가기(杜家驥)의  『淸皇族與國政關係硏究』와도 교차검증된다. 또한 이옥지의 논저 역시도 천총 9년의 전관니루 분정에 관해 언급하며 도표에서 잉굴다이를 양백기로 기술한다. 이들 모두 『내국사원당』 천총 9년 정월 22일의 기사를 기반으로 한 연구이며, 이를 통해 잉굴다이가 1635년 무렵 양백기 소속이었음이 확실시된다.4


이를 통해 살펴 보자면 잉굴다이는 홍타이지 사후 도르곤의 양백기 개혁 이후에는 확실하게 정백기 기속을 가지고 있었으나 홍타이지 시기에는 양백기 소속이었다. 또한 그 이전인 누르하치 시기에는 따로 기속을 바꾼 흔적이 없는 것을 보아 정황기의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잉굴다이는 그가 후금/청의 관료로 살아가는 동안 몇 차례고 소속기의 기명이 바뀌었으나 실제적으로 본인이 다른 기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그저 본인이 소속된 기의 이름이 후금/청 내부의 정치적 변동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었을 뿐이다.  요컨대 그가 소속된 정황기가 양백기로, 양백기가 다시 정백기로 바뀜에 따라 그는 실제적으로 다른 기로 전출을 가지 않았음에도 표면적으로 계속 소속이 변화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기명(旗名)인 정백기가 팔기통지나 팔기만주씨족통보등에 그의 유일한 기적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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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추노>의 잉굴다이. 필자가 아는 한 그나마 가장 선역에 가까운 잉굴다이이다.)




1.『八旗滿洲氏族通譜』 卷11,;『?定八旗通志』卷156;『?史稿』 卷228; Arthur W. Hummel, 2010,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1644-1912),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394.

2.확실하게 과정과 결과가 알려진 도르곤의 양백/정백 기색 교환과는 다르게 누르하치 사후 이루어진 양황기(兩黃旗)와 양백기(兩白旗)의 변환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스기야마 키요히코 교수(杉山淸彦)의 논문과 그를 저본으로 한 김선민 교수(이하 직함 생략), 그외 박민수나 맹소신등의 정백기->정황기·양백기->양황기/ 정황기->양백기·양황기->정백기를 정론으로 보고자 하며, 실제로도 이것이 통설이다. 실제로 내국사원당 천명 8년의 기록과 그에 대응되는 홍타이지 치세 초기의 관직 전임 기록을 살펴보자면 해당 추론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살펴진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기회가 되면 다루어 보고자 한다. 杉山淸彦,2001, ?八旗旗王制の成立?, 東洋學報 83(1). 54p.;김선민, 2014, 「청 초기 팔기와 조선 무역」, 『사총』 82,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42쪽등

3.도르곤의 도도 처벌을 빌미로 한 양백기 지배 구조 개혁에 대해서는 이명제, 2021, 『17세기 청ㆍ조선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49~150쪽 가 잘 요약했다.

4, ?井?也, 2008, 「?初ニル類別考」,『立命館文?』 608, p.115;杜家驥, 1998,  『淸皇族與國政關係硏究』, p.98;이옥지, 2021, 「천총 8-9년 후금의 동해여진 원정과 홍타이지의 팔기 개혁」, 『명청사연구』 55, 명청사학회,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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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래도 추천 내놔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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