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제임스 본드 영화에 매료되어 첩보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CIA는 실제로 어떻게 움직일까?”라는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비밀스럽고 대담한 작전, 세계 곳곳에 뻗어나가는 정보망, 흔히 말하는 ‘스파이’ 활동 등이 매체를 통해 미화 혹은 과장되어 그려지지만, 정작 미국중앙정보국(CIA)이 내부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CIA는 생각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다른 기업이나 기관에 투자함으로써 새로운 기술들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정부와 CIA가 택한 한 가지 방법이 바로 ‘In-Q-Tel’이라는 독특한 벤처 캐피털 회사를 설립한 일이었다. 정부 기관이 왜 굳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려고 할까? 여기에는 CIA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미국 내에서 직접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제한적인 위치에 놓인 CIA가, 그 대신 민간 스타트업들이 만들어 내는 참신한 기술력을 간접적으로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이 “우리 혼자서 모든 걸 개발하기보다는, 이미 민간에서 빠르게 혁신을 일으키는 기업에 투자해서 그 기술을 가져오자”라고 판단한 셈이다.
이처럼 In-Q-Tel이 발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CIA가 최초로 눈길을 준 여러 스타트업 중 하나가 바로 팔란티어(Palantir)다. 2003년에 설립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는 빅데이터를 수집·분석해 특정 목표나 현상을 시각화하고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왔다. 이는 테러나 국제 범죄를 막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야 하는 정보기관에게 매력적인 기술이었다. 가령,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 곳곳에 흩어져 있는 테러 용의자의 이름, 금융 계좌, SNS 활동 내역 등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유기적으로’ 조합해볼 수 있다면, 기존에는 놓쳐버렸을지도 모를 수상한 움직임을 훨씬 빠르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팔란티어는 바로 이런 기능을 제공했는데, CIA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 나아가 CIA는 단순히 데이터 분석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미국 정부로부터는 물론, 국방부, FBI, NSA 등 다양한 기관에서 수집된膨대한 양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분석 능력뿐 아니라 그 정보를 특정한 구조로 통합하고 효율적으로 시각화하는 기술도 중요했다. 팔란티어의 ‘Gotham’ 플랫폼은 이러한 요구에 최적화된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고 알려지면서,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 기업들까지 팔란티어의 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금융 사기를 잡아내고, 헬스케어 분야에서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정리하는 작업에도 팔란티어 기술이 적극 도입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팔란티어가 단지 ‘정보기관을 위한 비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사이트 창출”을 원하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 가능한 기술력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CIA가 팔란티어에 자금을 투자하고 초기부터 손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서 “제2의 팔란티어”를 찾는 움직임이 커지기도 했다. 즉, 아직은 덜 알려졌지만, 향후 국가 차원의 첨단 기술·보안 수요에 힘입어 급성장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발굴하려는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비록 군수·정보 분야라는 특수 영역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긴 하지만, 팔란티어가 정부 계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이익을 창출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러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특히 경제 상황이 불안정해질 때, 정부기관과 맺은 안정적인 계약이 기업을 든든히 받쳐준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투자 포인트가 되었다.
그렇다고 팔란티어가 늘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은 아니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민감한 정보를 다루다 보니 ‘프라이버시 침해’나 ‘정부 감시 기구에 기술을 제공한다’는 부정적 시선이 뒤따르기도 했다. 기업으로서는 민간 분야로 확장을 더욱 빠르게 추진해야 하는데, 정부나 국방 분야에서 쌓아온 보안·비밀 유지의 성격이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어색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 정책이나 국제 정세에 따라 관련 예산이 갑작스레 줄어들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도 리스크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란티어의 이야기는 “민간 첨단 기술과 국가 안보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세계가 실제로 벌어지는 현장에서, 국가 기관은 스파이 활동이나 군사 작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혁신적인 기술을 활용하고 있고, 팔란티어 같은 스타트업은 그 기회를 발판 삼아 몸집을 키운다. CIA가 이런 투자 방식을 선호하는 것도 단순하다. 직접 모든 걸 개발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고, 이미 민간에는 재능 있는 인재와 탁월한 아이디어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들을 지원하고 지분을 확보하는 편이 CIA에게도, 국가 안보에도, 그리고 그 스타트업에게도 서로 윈윈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새로운 기술에 민첩하게 투자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CIA의 행보를 보면, 그동안 막연히 생각했던 “비밀스러운 정보기관” 이상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비즈니스 전략가나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 팔란티어를 하나의 성공적인 사례로 삼아 비슷한 사업 모델을 탐색하고, 첨단 기술 분야에서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기업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정보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팔란티어가 CIA의 투자를 발판으로 일어선 뒤, 다시 정부와 민간을 넘나들며 자신의 기술을 고도화하는 과정은, 국가 안보와 빅데이터 분석의 결합이 앞으로도 얼마나 무궁무진한 기회를 열어줄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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