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중략)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고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송 인종 경력 4년 6월』
"(소동파가) 항주(杭州) 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송나라)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송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로서 (고려 사신의)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송(宋)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다"
『소식 묘지(墓誌)』
“1084년 고려사신 숙소인 고려정을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하이저우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송나라의) 백성들 가운데는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 고려정의 장려함에 탄복해서 시 1수를 남긴다.”
『소식시집』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아뢰길,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 송나라)를 미폐(靡?)케 하였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
"호순지(胡順之)가 청주(靑州)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고려가 사신을 보내오자 환관이 끼고는 중요하다고 여겨 청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城) 밖의 교(郊)에서 고려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호순지가 “청주는 큰 군진(軍鎭)이다. 당나라 때에 신라(新羅)와 발해(渤海)를 맡았는데,
어찌 (고려에게는) 이 같이 비굴한가?”라고 말하고는 홀로 고려 사신에게 절하지 않았다."
『송사 권303 열전62, 1020년 4월』
한줄 요약: 이성계의 이씨조선이 강제로 각인시킨 뿌리깊은 노예 근성은 우리의 근본과 전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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