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은 명나라 시기의 그림임.
처음 보면 누구나가 느끼지만 여자들이 입은 복식이 중국옷 같지 않고 한복과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한복이 원말명초 중국옷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위 그림속의 옷이 정말 중국풍의 옷일까?
아래는 중국의 전통적인 여자 기본 복식이다.
전통적으로 한대 이후의 중국의 여성 복식은 치마를 윗옷 위에 입으며, 치마의 실루엣 또한 통이 좁으며 약간 끌리는 1자 형이다.
(여기에 예를 갖출 때나 추울때는 위에 포를 입음)
이러한 복식의 기본 구조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맨 위의 그림과는 아무리 봐도 많이 다르지?
그럼 원나라가 망하고 난 뒤의 그림이니 몽골 복식의 영향 아닌가? 할수도 있지만..
원나라당시 몽골의 전통 복식이다.
대충 봐도 맨위의 그림과는 차이가 많이난다. 맨 위의 그림이 몽골풍은 명백히 아님을 알수있다.
맨 위의 그림은 아무리 봐도 오히려 한복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저고리 두루마리 바지 등 한복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주름잡힌 치마의 풍성한 실루엣, 그리고 바지나 치마를 먼저 입고 그 위에 저고리를 입는다는 점, 상의와 하의가 둘로 나뉜 이분적인 모습이라는 점이 한복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 아래는 고구려 벽화 속의 옷으로 백제, 신라, 가야도 아래와 비슷한 모습의 옷을 입었다. )
삼국시대부터 보여지는 한복의 특징들이다.
풍성한 치마와 상하의로 나뉜 이분적인 모습, 그리고 저고리를 치마 바깥으로 꺼내입는 모습임
그리고 이러한 기본 구조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맨 위의 그림 속의 옷은 명백히 오리지널 중국옷(한푸)도 아닌, 몽골옷도 아닌, '한복'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한복
눈치가좀 있는 게이들은 감이 올꺼다. '맨 위 그림 속의 옷이 한복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구나' 하고..
그리고 이것에 대한 당시 명나라시대의 기록들이 몇개 있다.
장욱의 <궁중사>
" ?昱《?光弼?集》卷三《?中?》: ?衣新?高??,方??腰半臂?,?夜?家?借看,?曾着?御前?。"
"궁중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것은 고려양이라네 방령, 짧은 허리, 반소매 궁중 여인들이 밤까지 이어져 구경하려 하네 이는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 이 옷을 입고왔기 때문이라네"
[속자치통감 권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治通? 卷二百一十四 元?三十二》??:“后亦多畜高?美人,大臣有?者,?以此?之,京??官?人,必得高?女然后?名家。自至正以?,?中?事使令,大半高?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高?,?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과 권력 있는 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 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의 일을 하는 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세상에 미친듯이 들고일어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숙원잡기]《菽???》::“?尾裙始于朝??,流入京?……于是无?无?,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老万公安冬夏不?……。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많이 입게 되었다. 각로 모두 공, 사,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만포필기] 《寓圃??》:"?裙之制,以?尾?成,系于?衣之?。?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若一?。",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미군이은 치마에 살을 대어 부풀리는 것으로 한반도 복식에서 유래된 것이며, 외에도 한반도의 복식은 궁내, 궁외, 귀천을 넘어 중국의 남자 복식에까지도 넘어가게 된다.
양유정(楊維楨), 무제효상은체(無題效商隱體) 繡靴??句驪樣, 羅?垂彎女直?. 願汝康?好眠食, 百年歡樂未渠央.
"공 찰 때 신은 수놓은 신은 고려 것을 닮았고, 비탄 손수건은 구부렸다 폈다하며 여인들이 치장하네. 그대여 편안히 잘 자고 잘 먹기를 바라네. 오래토록 근심 없이 즐겁기를."
또 陶宗儀, 南村輟耕錄권28:“杜?碧先生本應召次錢唐, 諸儒者爭趨其門. 燕孟初作詩嘲之, 有‘紫藤帽子
高麗靴, 處士門前當怯薛’之句, 聞者傳以爲笑. 用紫色棕藤縛帽, 而制靴作高麗國樣, 皆一時所?.”
“두청벽 선생은 소집에 응하여 전당에 갔다. 여러 유생들은 앞다투어 그의 주소로 달려갔다. 연맹초는 시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시에는 ‘자색의 종등(棕藤) 모자에 고려신발. 처사들은 문 앞에서 잡역부를 담당하네. 란 구절이 있다. 듣는 자가 모두 이를 전하여 웃는다. 자색의 종등으로 모자를 묶고, 고려의 모양으로 신발을 만든 것은 모두가 당시에 유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權衡, 庚申外史:“自至正以來, 宮中給事使令, 大半爲高麗女. 以故, 四方衣服鞋帽器物, 皆依高麗樣子. 此關系一時風氣, 豈偶然哉!”
"권형(權衡), 경신외사(庚申外史) 지정 이래 궁중의 급사와 사령은 태반이 고려의 여인이었다. 이 때문에 사방의 의복과 신발, 모자, 기물이 모두 고려를 따라 일시의 유행이 되었으니 어찌 우연하다 할 수 있는가?"
가한노인집(可閑老人集)권221:“緋國宮人直女工, 衾?載得內門中. 當番女伴能包?, 要學高麗頂入宮
"붉은 비단 나라 궁녀들 직공에 능하여 궐문 안에서 이불을 수레에 실어서 간다네. 당번이 된 여자 짝이 보자기를 잘 만드니 고려 여인을 흉내 내어 머리로 받쳐 입궁한다네"
등 많이 전한다.
명백히 한복의 영향임이 드러남
그리고 맨 위의 그림이 이러한 '고려양'이 최고로 유행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고, 온 세상이 미친것 처럼 고려문화를 모방하던 때였으니, 당시의 중국옷이 한복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것도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원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한국복식은 중국에서 유행을 했고 꽤 깊숙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수있다.
그 결과 중국에서도 아래의 모습과 같은 옷이 만들어짐
원대(몽골) 복식 고려양, 元朝 服? 高??
명나라 고려양 한푸 , 明朝 服? 高??
명나라 고려양 한푸 (?服)
명대 복식 고려양, 明代 高?? 服?
원나라 고려양 복식, 元代 服? 高??
여의명비전의 고려양 한푸 / 女?明妃? 明朝 高?? ?服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복식을 가리켜 중국 정통에 맞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
결국 호풍(胡風)을 몰아내고 중국 전통 복식을 되찾자는 운동도 생겨나며, 고려양이 요사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령(원조 한한령?) 이 내려지며 빠른 시간내에 사그라진다.
고려양이 사그라진 이후의 명나라 의상들
고려양이 사그라진 이후의 명나라 의상들
고려양이 사그라진 이후의 명나라 의상들
한국 복식이 중국 복식에 영향을 줘도 엄청나게 줬다
문화라는 것은 항상 쌍방향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엄청나게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했다는 편견이 만연한게 사실임.
실제로 여러 중국의 고문헌에서 고려양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많은 중국인들은 "대장금옷은 중국을 베낀 짝퉁이다..!"는 등의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하고 있음.. 한국인들 중에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고..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도 있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 비슷한 경우가 일본에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카마쓰 고분벽화나 부상략기(扶桑略記)의 백제옷 기록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 부상략기에는 '불사리 봉안식에 소가노 우마코를 비롯한 백여명의 대신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고 보는 사람들마다 기뻐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그 시기의 일본 고분벽화에는 한반도 풍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한반도풍 옷을 입은 여인들로 유명한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 위의 자료들과 비교해볼만 하다. (694년 ~ 710년)]
아래 사진은 같은 시기의 중국 복장으로 한국풍 옷이나 다카마쓰 고분벽화의 복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복 기모노 원나라 한푸 / 명나라 한푸 / 원나라 복식 / 명나라 복식 / 明代 服? / 明朝 服? / 元代 服? / 元朝 服? / 明代 服? / 明朝 服? / 元代 服? / 元朝 服? / 明代 ?服 / 明朝 ?服 / 元代 ?服 / 元朝 ?服 / 高?? / 高??
???????중원땅에서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해갈때마다 복식과 문화가 변해갔지만
한반도는 외부의 영향을 받더라도 고대부터 기본적인 고유 풍속이 계속 이어졌다.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조선
시대가 지나며 왕조는 바뀌었어도 그 안의 주류민족이 그대로였기때문에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는 있을지언정 한복의 기본구성인 치마,저고리,바지등의 복식 형태는 기본적으로 계속 이어져왔다.
착각하는게 한복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생긴 복식이 아니다.
심지어 원 간섭기에도 고려왕조가 화친하는데 첫째 조건으로 내세운게 바로 고려풍속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니들한테 대가리는 숙이지만 우리 살던대로 살게 내비둬~ 한거다
그때 고려의 풍속이 원나라에도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고려양' 이라고 한다.
이 고려양이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왕조인 명나라가 들어서면서도 한동안 계속 유행했고
홍치제때나 되어서야 금지됐을 정도.
물론 한반도 왕조들이 중원왕조들에서 아예 영향을 받지않은것은 아니다.
궁중 예복이나 관복들은 중원왕조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관복이나 용포등에 국한된 것이지 백성들이 입는 평상복은 고대부터 오래도록 기본형태가 이어져왔다.
차라리 한복의 원류를 찾는다면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명나라 한푸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호복 계통의 북방 스키타이계 호복에서 찾는게 더 연관성이 있을것이다.
말을 자주타는 북방 기마민족 특성에 맞게 상하의 분리형태의 공통점을 가지고있는점이
한복또한 호복의 일종으로 분류할수있기 때문이다.
신라는 1000년 역사를 가졌고
고려 조선도 500년의 역사를 가졌다
당대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들이었는데
100년도 안되서 멸망하는 나라가 수두룩한게 짱깨 역대 왕조들이다
이렇듯 문화란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것이다
당장 짱깨들 입식문화나 양고기 문화도 북방문화에 기원하고있고
얼후같은 현악기도 원래 유목민의 악기에서 기원한다
지금 중국문화라고 하는것들도 결국은 중국에서 기원한것이 아닌것들이 많은것이다
모든 문화가 중국에 기원한다는 짱깨들 생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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