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 비교〉
고려(高麗)
조선(朝鮮)
국제무역
벽란도 국제무역항에서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짐.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아라비아(중동), 중앙아시아 상인과도 무역을 하였음. 이때문에 고려라는 이름이 서양에 알려지게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 영어이름이 Korea가 됨. 또한 국제무역항은 외국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고려왕조는 벽란도를 통해, 시비법(비료농법), 이앙법(모내기), 목화(면화), 화약 등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으며 각종 선진 문물제도는 자국의 실정에 맞게 수용/개조/발전시켰음. 한반도는 자원이 부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고려왕조는 벽란도 무역항을 통해 부족한 금속자원(구리, 주석 등) 및 건축자재들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었다.
국제무역에 관한 개념조차 없어짐. 명나라와 공무역을 하였으나,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음. 게다가 벽란도처럼 번성한 국제무역항이 없었기 때문에 선진문물이 조선땅에 들어올 수 없었으며 무려 500년 동안 오늘날 북한과 같은 고립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 근시안적으로 중국의 모든 것을 추종하고 모방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발전된 기존의 문물제도는 거부/폐지/후퇴하였으며, 독자적인 발전 또한 이루지 못한 채 날로 발전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추방되기에 이름.
항해술
고려인들은 국제무역을 중요시하고, 원양항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고려의 배가 직접 중국에 가서 정박했다. 이로인해 중국 산동성 등주수성에서 고려 선박이 발견되기도. 심지어 태조왕건은 후삼국 통일 후 이듬해 통상선을 일본으로 직접 보내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거대한 고려의 함선을 보고 겁을 먹었던 일본은 통상을 거부하였음. 고려왕조는 고려 배와 외국의 무역선이 개경의 벽란도항으로 안전하게 들어오도록 유도하기 위해 전남 흑산도에서부터 개경 벽란도항까지 약 400km~500km의 연안과 섬 곳곳에 등대(봉수대를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고려인들에게 바다와 섬은 중요한 요충지이자, 자원의 보고였다.
조선시대 때는 폐쇄적인 사상에 빠져서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시행하고, 해안지역을 일부러 황폐화시켜서 바다를 버렸다. 바다는 농사지을 땅이 없고 어부와 해적들이 사는 천한 땅이라고 버린 것. 결국 원양항해술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 중국으로 가려면 육로나 중국배(명나라 사선)을 이용했고, 일본으로 가려면 일본배를 타야만 했다. 조선배들은 모두 연안항해만 가능했음. 심지어 이순신함대(판옥선, 거북선)도 연안함대(바닥이 평평한 평저선)로서, 먼바다로 항해할 수 없었다. 먼바다로 나가는 순간 조선배들은 높은파도를 타지 못하여 침몰했기 때문이다. 결국 구한말 일본이 조선에 먼저 통상선(운요호)를 보내 강화도 조약을 맺고, 조선을 장악하게 되어 고려 때와 정반대 상황이 펼쳐진 것. 즉 조선이 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다를 버렸기 때문이다.
상업
상업가(기업가)가 세운 나라였기에, 상업을 중시했음. 수도 개경의 시전(남대가)은 우리민족 역대왕조 중 가장 큰 시장거리였으며 4경 등(개경/서경/동경/남경) 주요 대도시에는 술집, 찻집, 만두가게 국수집 등 각종 요식업도 발달함. 국가가 제도적으로 상업을 장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점들을 관(국가)에서 직접 운영하여 <관영상점>이라 부름. 이러한 관영상점들이 고려 전기(성종 대)에 이미 설치되었으니(성례점成禮店·낙빈점樂賓店·연령점延齡店·영액점靈液店·옥장점玉漿店·희빈점喜賓店 등)지방에서도 당연히 상거래가 성하고 시장이 들어섰음.
유교(성리학)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에 따라 상업을 철저히 억제하였음. 고려 때의 관영상점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그저 관에서 상행위를 허가하는 <관허상점>이 존재한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다. 지방에 시장이 서게되면, 어디서 천한장사를 하느냐며, 철저하게 통제하였으니 조선 후기(숙종이후)에 가서야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점차 발전하게됨. 하지만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 발전의 정도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곧 산업혁명이 태동하게 될 근대서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뒤쳐졌음.
화폐
수도 개경에서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었음. 고려왕실은 신료들에게 녹봉으로 곡물 외에도, 화폐를 지급하였음. 화폐는 주로 요식업에서 통용되었음. 고려 사람들은 화폐를 가지고 술집에서 술과 안주도 사먹고, 만두집 국수집에서 만두와 국수도 사먹었다고 함. 화폐유통으로 인해 개경에 요식업이 발달하여, 세계 최초의 찹쌀도너츠(개성주악)까지 개경 중심가에 등장하게 됨. 고려왕조는 '은병화'라는 고액권 화폐까지 만들어서 주조차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었음.
원시물물교환 경제로 퇴보함.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동안 쌀과 면포(무명)가 화폐기능을 하였음. 당연히 수도 한양에서도 요식업이 발달하지 못함.
수공업
수공업이 발달하여,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냈음. 고려의 수도 개경은 많은 인구를 보유했고 (광역인구 50만), 구매력이 높은 귀족들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소비력이 거대했다. 이러한 왕성한 소비력을 보고 지방의 수공업자들이 최고의 물건들을 만들어 개경으로 보냈으며 수공업자들이 개경으로 와서 많은 물건을 생산하고 상인들에게 판매했음. 개경에서는 수공업자들이 비슷한 업종별로 모여서 전문거리를 형성했는데 '철동'이라는 곳에서는 농기구, 무기류, 금속기구를 제조하는 수공업자들이 함께 모여서 일함으로써, 생산과 판매에서 효율성을 높였음. 이때문에 개경에만 오면 모든 물건을 다 구매할 수 있었고, 전국으로 연결되는 육로도로망과 수로망을 통해 개경의 물건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백성들이 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음.
유교(성리학)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에 따라 수공업자, 기술자들을 천시하였음. 게다가 유교의 검약사상에 따라, 검소함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 수공업자가 좋은물건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팔 시장이 없었고, 소비할 소비자가 적었음. 결국 수공업이 쇠퇴함. 도자기도 백자같은 문양이 없고 상품성이 없는 도자기만 만들게 되어, 도자기 수출국 및 종주국 자리를 중국과 일본에 내주게됨. 게다가 조선시대 때 수공업이 쇠퇴하고 도로가 없었졌으니, 농기구를 제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그것을 판매하고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이 없었으며, 제조한 농기구를 수레로 운송할 수도 없었으니, 농촌지역에 농기구가 제대로 보급이 되지않아, 농업생산량 증가도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도로
도로망이 아주 잘 발달했음. 고려시대 행정조직인 3경 10도 12목 4도호부는 22개 역로(驛路)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도로는 수레가 양방향으로 교행할만큼 넓었으며, 도로포장은 작은 자갈을 바닥에 깐다음 사질토를 다져서 노면을 조성하였고 배수로까지 설치되어 있었음. 큰도로에는 가로수까지 심었다고 함. 놀랍게도 오늘날 지방국도노선은 고려시대 22개 역로망과 일치한다. 고려 전국 22개 역로망에는 정류장/휴게소/주유소(말먹이 보충) 역할을 하는 525개의 역참(驛站)이 있었고 역참간이 평균거리는 30리(약 12km). 민간운송업자, 민간여행객을 위한 정류장/휴게소/주유소였던 '원'도 역참과 비슷한 숫자이거나 더 많았다고 함. 도로가 발달하면 지방에도 상업이 발달하게 됨. 특히 민간여행객들의 휴게소이자 주유소였던 '원'에서는 지역농산물과 특산물 그리고 수도 개경에서 수레에 실려 내려온 진기한 물건들과 수공업제품, 식품들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고 함.
조선왕조는 재정이 빈약하여, 도로망을 유지할 수 없었음. 결국 수레가 다닐 수 없는 원시 도로로 퇴보함. 지방에 물자(특히 농기구)가 부족해지고, 상업이 쇠퇴함. 악순환의 반복.
상무정신(尙武精神), 군사력
최소 20만 대군 보유(상비군:10만, 호족연합군, 지방군:1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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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사력과 상무정신으로 한때 중국(송나라), 몽골(거란)과 함께 동아시아 3대 강국에 위치하고 있었음. 고려왕조 500년 동안 외침을 받을 때 단한번도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모두 자체 군사력으로 해결하였음.
외국과의 전면전시 동원 군사력이 평균 20만 명이었으며 (여요전쟁, 여진정벌, 홍건적 격퇴). 이정도 동원력이면 웬만한 외적들은 다 막을 수 있었음. 말기에도 20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고려왕조의 재정이 튼튼했고, 전문군인의 수가 많았다는 것임. (전성기에는 대략 5~60만 병력) 최정예군이었던 중앙군이 4만5천 명 규모였고, 주진군(변경주둔군:5만~6만)과 호족연합군(지방군,주현군: 10만)까지 합하면 최소 20만 명 이상의 군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왕실, 신료, 지방호족 모두 문무를 겸비하여서, 전문군인의 수가 두터웠음.
고려는 고구려가 과거에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군사강국이었기에 이러한 타이틀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배층들이 상무정신을 가지고 군사력을 키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국호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지배층들이 모두 상무정신을 가지니 문신들도 무예를 익히고 군사전략을 공부하였으며(문무를 겸비했음), 국가의 명예를 강조하며 조국의 운명을 강대국에게 맡기는 정신적인 타락(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고려왕조 창업자인 태조왕건이 상업가(기업가)였으므로 합리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상업을 중요시여겨 국가재정을 탄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키우는 재원도 잘 마련할 수 있었다.
7천~8천 명 상비군 보유
조선중기부터 구한말까지 이정도 병력을 계속 유지.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900년대에도 7천 명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음. 조선왕조는 우리나라 역대왕조 중 군사력이 가장 약했던 왕조였다. 상무정신은 당연히 없음.
성리학을 중심사상으로 삼고 무인들을 차별했기에, 조선사회에서 군인이란 장교/병졸을 가리지 않고 기피대상이었음. 반면 국가로부터 합당한 보수와 충분한 대우를 받았던 고려의 군인은 고려사회에서 매우 인기직업이었는데, 고려에도 무신정변이 있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무신정변 당시의 무신들이란 집권당이었던 개경파 문신들과 대립하는 중소귀족층이 그 주류였다. 즉 일련의 정치적 사건(여진정벌의 책임/묘청의난)을 통한 알력 다툼에서 호전적이었던 서경파 문신들이 주화적인 개경파 문신들에게 패하자 군부의 지위가 덩달아 크게 위축되면서 전반적인 군 천시 현상으로 이어졌을 뿐이지 고려사회에서 기본적인 군인의 대우나 위상, 그리고 상무정신 등은 애초부터 조선사회와 결이 다름.
조선시대 지배층이었던 문신과 양반들은 유교경전만 읽었고 군사전략과 무예를 전혀 연마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재정도 매우 빈약하여, 군대 1만 명 이상 키울수가 없었음. 이때문에 전문군인의 수가 너무 적었으며 상비군의 규모는 8천여 명에 불과했고 장군과 지휘관의 숫자도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된 군대를 운영할 수 없었음. 결국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같은 전면전이 터지면, 자체군사력으로 대응할 수 없어서 명나라의 구원병만 기다렸음. 구원병이 못오면 산성에 숨는것밖에 방법이 없었음.
국가재정
고려말기(우왕/공양왕): 100만 석 규모(토지세)
상업에서 나오는 이익까지 합쳤을 때 실제 재정규모(특히 최전성기의 재정규모)는 이보다 몇배는 더 컸을 것임.
조선 최전성기 세종대마왕시기: 60만 석 규모(토지세)
조선전기 평균: 20만 석 규모(토지세)
노비비율
고려말엽 전체인구에서 3~5%
고려시대 노비비율이 이렇게 적었던 것은 고려사회가 북방민족기풍이 있어서 역동적이었기에 노비에서 해방되기가 수월했기 때문임. 120일 수준의 노동비만 지불하면 노비에서 해방될 수 있었음. 노비에서 해방되면, 고려조정의 고위직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음. 이의민, 김준 등이 노비출신이었다가 재상까지 올라간 인물이었음. 게다가 노비종부법을 실시하여, 노비가 되기가 어려웠음.
조선중기 전체인구에서 40~50%
조선시대 때는 양반들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엄하게 규정하였고, 이에 대한 자체적인 법률(악법)체제까지 완비하였기에, 노비에서 해방되기가 어려웠고(660일 수준의 노동비를 지불해야 해방됨), 해방되더라도, 관료사회에 진출하기가 매우 어려웠음. 노비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노동비를 고려시대의 120일 치 → 660일 치로 5배 이상 늘린 이들이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양반)였음. 660일치 노동비면 사실상 조선시대 때 한번 노비가 되면 노비신분에서 해방될 가능성이 없었다고 봐야함. 게다가 양반들의 눈치를 보았던 세종은 노비종모법을 도입하여 노비 수를 대폭 늘렸음. 결국 조선양반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들 부려먹으면서 잘 살 수 있었으나, 조선왕조는 국가에 세금을 낼 양민들의 숫자가 적어져서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름. 재정의 파탄은 결국 군사력이 약화된 정도가 아니라 수천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도 버겁게 되어 군대가 사실상 없는 국가로 전락함.
대표인물
1. 서희: 거란1차 침입 때 외교전을 벌여 강동6주 영토를 확보함.
2. 양규 장군: 거란2차 침입 때 대활약했던 맹장
3. 강감찬 장군(문신): '귀주대첩'. 귀주벌판에서 동북아시아 최강 거란군 10만을 전멸시키고 고려를 동북아시아 3대 강대국으로 격상시킴. 고구려시대 이후 한반도왕조의 국제적 지위가 가장 높았던 시대를 열었음.
4. 윤관 장군(문신): 17만-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여진정벌 수행.
5. 척준경 장군: 여진정벌 때 대활약, 고려를 넘어 동북아시아 최강의 무인 중 일인이었음.
6. 김취려 장군: 고려 고종 때 북방의 맹장
7. 최영 장군: 왜구와 홍건적을 격파하고,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성한 고려 최후의 충신 및 맹장
8. 김경손 장군: 여몽전쟁 때 대활약한 고려후기의 맹장.
9. 최무선: 우리민족 최초로 화약 및 화약무기를 제조하여 고려군사력을 크게 증강시킴. 왜구격파. 조선이 군사력이 약했음에도, 임진왜란 때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덕분임. 이순신의 활약도 화약무기(대포) 덕분임. 만약 조선에 화약무기가 없었다면, 임진왜란시기부터 한강이남지역은 모두 일본땅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음. 그만큼 조선인들이 무력이 약하여 창, 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고, 조선군은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못할정도로 아주 허약했음. 만약 고려왕조가 유지되었다면 고려군들의 뛰어난 창, 칼 솜씨와 화약무기전력이 결합되어 무서운 군사력을 보유하였을 것이고, 만주진출이 가능했을 것임.
10. 문익점: 우리민족 최초로 목화재배에 성공하여, 우리민족이 면으로 만든 질좋은 무명옷을 입게하였음. 면옷은 질겨서 세탁이 가능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하여 우리민족이 옷을 자주 갈아입게되어 더 위생적으로 살게됨. 게다가 백성들이 겨울에 따뜻한 '누비솜옷'을 입게되어, 겨울에 동사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
11. 이규보: 고려중기 문신이자 뛰어난 문장가
12. 일연: 고려중기의 승려, '삼국유사'를 집필하였음.
13. 김부식: 고려중기 문신이자 '삼국사기'를 집필하였음.
14. 의천: 고려전기의 승려, 고려의 화폐경제 발전에 일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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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지배층들 중(문신, 무신)에 유일하게 군사력을 키워서 전쟁에 대비하였음. 조선조정이 재정이 부족하여, 지원해주지 못하자, 자체적으로 농사를 지어서 군량을 확보하고, 자체적으로 무기와 군함을 제조하여, 군사력을 키웠음. 군사력이 증강되자, 자신의 군사전술에 맞게 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음.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에서만 일본해군과 전투를 벌여,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음. 일본해군과의 전적이 38승 5무. 조선역사 500년 중 유일하게 영웅급 인물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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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순신의 활약도 고려시대 최무선의 화약무기 덕분이었다. 이순신과 그의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 시 칼과 창으로 싸우지 않았다. 조선군이 칼과 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화약과 화약무기(대포)를 대거 확보하여, 일본함대가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대포를 쏴서 격파한 것. 또한 일본함대가 조선대포 사정거리로 들어오지 않거나 좁은 해협과 수로에 박혀있으면, 일본함대를 대포를 쏘기 좋은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에 대포를 쏴서 격파하였음(한산도 대첩). 당시 일본함대는 대포가 없었기 때문에 대포로 중무장한 이순신 함대에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은 조선군의 장단점과 일본군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한 뒤(뛰어난 분석가였음)에 본인에게 유리한 전투상황을 만들어서 전투에 임하였고, 일본해군과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전
☞ 고려처럼 화폐경제, 도로망, 원양항해술, 튼튼한 국가재정, 상공업, 군사력, 국제무역 등 기본적인 인프라와 제도를 가지고 있어야, 서양에서 근대문물을 받아들여서 기존의 인프라와 제도를 업그레이드시키고, 동시에 서구열강의 침공을 막아내서, 일본처럼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성공한 나라는 동양에서 일본뿐이었음) 조선은 이러한 인프라 및 제도가 아예 없거나 낙후되어서, 서양문물이 들어와도 기존의 인프라와 제도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 없었다. 즉 기초체력이 너무 약했기에,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망한 것이다. 특히 빈약한 국가재정은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이라도 튼튼했다면, 무엇이라도 해보다가 또는 일본과 전쟁이라도 몇번 해보고 망했을텐데.... 나라가 얼마나 약했는지 일본과 전쟁한번 못해보고 나라와 국권을 넘겨주었다.
☞ 고종 때 고작 신식군대(별기군) 80 명을 키우니까 국가재정이 바닥이나서, 구식군대 재정을 뽑아쓰다가, 결국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가 엉망이 되자(12개월 체불된 임금 대신에 모래섞인 쌀을 지급했다고 함)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이 임오군란도 진압할 능력과 재정이 안되다보니까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사실상 당시 나라가 이미 망했다고 봐야 한다. 아니 면적이 22만제곱킬로미터(영국면적과 비슷함)에 달하고, 인구가 1700만~1800만에 달하는 큰나라의 정부가 고작 신식군대 80 명 키웠다고 재정이 바닥났으니, 이게 나라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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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문에 조선은 개항을 늦게해서 망한것이 아니다. 이미 나라가 망한상태에서 늦게 개항을 했을뿐이다. 개항을 일찍하면, 일찍한만큼 서구열강에게 일찍 잡혀먹혔을 뿐이었고 자력근대화는 불가능했다. 이미 서기 1392년 조선건국과 동시에 사실상 나라가 망한것이다. 조선왕조 500년내내 단 한번도 나라가 제대로 운영된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영향력(고려의 과학기술, 제도, 도로, 군사력)이 남아있어서 강성하게 보였던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들이 단한번이라도 나라를 실용적으로 제대로 운영했다면, 후기로 갈수록 조금이라도 더 강력해지고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조선후기로 가면 갈수록 성리학 사상은 더욱 폐쇄적, 교조적으로 변했고, 양반들의 횡포(세도정치)는 더 심해졌으며, 노비 숫자도 더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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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최악의 역적 2인방, 이성계와 김일성
※ 대한민국이 고구려[고려]의 실용적인 상업정신과 용감한 상무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이유는 무릇 국가란 경제력과 군사력을 부지런히 성장시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어야 그 다음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개의 조선은 경제와 군사를 등한시 하고 세뇌와 선동으로 연명했기에 실패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일 선동에 눈이 멀어 지금처럼 이씨조선의 역사를 미화하고 잘못 포장하여 비루했던 조선 정신을 계속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망국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줄 요약: 이성개와 개일성은 사지를 찢어발기고 부관참시를 해도 모자랄 민족사 최악의 역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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