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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가게.. | 22/10/14 12:26 | 추천 76

저번주에 어머니 보내드리고왔다. +11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44441176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적도, 웃어본적도 없는거 같다.

어머니 보내드리고 온놈이 무슨 정신으로 웃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반쯤 미쳤다고 해야할까..

내 어릴적 아버지는 대기업 2차 하청 업체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이었다.

남 부럽진 않아도 밥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됬기에 내 중학교 시절까진 특별히 좋은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말에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시고 급격하게 무너지셨다.

결국 아버지는 빚쟁이들에 쫓기다 못해 사업이 망한 이듬해 홀로 먼저 세상을 등지셨다.

장례를 치르고 엄마와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빚쟁이들을 피해 이사를 했고, 난 이사 온 곳에서 고등학교를 정말 숨소리도 안들리게 조용히 다녔다.

그 무렵 어머니는 내 뒷바라지를 위해 안해본일이 없으셨다. 식모부터 마트캐셔, 대리운전까지...

난 어머니의 고생을 알았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나름대로 괜찮은 대학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20살때가 가장 나에겐 즐거운 한해 였던것 같다.

어머니는 날 뒷바라지 하시면서도 억척 스럽게 돈을 모으셨고, 나 역시 과외, 아르바이트 등으로 어머니께 꼬박꼬박 다달이 얼마 안되지만 돈을 부쳐드렸다.

어머니는 그해 6월 반찬가게를 차리셨고 반찬가게를 차리던 날 어머니와 먹은 삼겹살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난 1학년을 마치고 바로 입대 했다.

상병 2호봉을 달고 정기 휴가를 나갔던날 어머니는 본인의 암소식을 나에게 전하셨다.

위암이었고 2~3기였다. 서둘러 반찬가게를 정리하고 어머니는 입원하셨다. 난 군대에 의가사 제대등을 요청 해봤지만 그역시 맘대로 되지 않았고

어머니 수술날 겨우 청원 휴가를 얻어 나올수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 수술은 성공적 이었지만 우리 모자에게 남은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다시 이 일 저일 하셨고 나는 군 제대후 과외도 하고 노가다, 알바등을 하면서 복학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점점 생활 형편은 나아졌고, 어머니께 일좀 그만 하시고 쉬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당장 내가 버는 돈으로는 우리 모자 밥먹는것도 힘들었기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학교를 그만두고 내가 돈을 벌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며 쓸때 없는 생각하지마라고 핀잔만

주실 뿐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만 잘되면 된다는 희망.

그 희망은 재작년1월에 처참히 깨졌다.

어머니 암이 재발하신것이다. 그것도 위, 간에 걸쳐서 말이다. 당장 입원을 하셔야 했고.. 난 복학을 미뤄둔채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과외, 알바등 닥치는 대로 일했고 어머니 병간호를 했다. 

항암이 두바퀴 돌고 어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셨지만.. 이내 열었던 배를 닫고 나오실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손쓸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다.

난 그때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빚쟁이에 쫓길때도 단 한번도 누굴 원망하거나 세상을 원망해보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하늘을, 세상을 원망했다. 

어떻게든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다. 아니, 하루라도 더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었다는게 맞는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머니는 1년8개월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나에게 남은건 병원비 때문에 받은 대출금 1300과 학자금 대출뿐..

난 이제 혼자다. 고아고.

우두커니 4일을 혼자 울다 웃다 잠들다를 반복했다.

그냥... 아무도 봐주지 않을 글이겠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 라도 하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유일한 사람인 우리 엄마가 없기에 익명이라는 힘을 빌려 누구에게든 이야기 하고 싶었다.

긴글 봐줘서 고맙다. 꽃도 좋고 위로 댓글도 고맙게 받겠지만... 욕은 하지말아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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