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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전
고려왕조의 실제 영토가 드러나는 순간 이씨조선과 좌파민족주의세력이 자행했던 대민족 사기극이 밝혀질 것이 두려운 나머지, 진실을 부정하고 환뽕몰이 똥 묻히기나 해대면서 기록을 제시하기 전에는 절대로 못 믿겠다며 버팅기는 후조선 국적의 짱깨 노예들이 많은데, 아니 기록이 없긴 왜 없어ㅋㅋㅋ 기록을 아무리 제시해도 눈 가리고 아몰랑~ 하면서 사장시키고 묻어버리니까 세상에 드러나질 않고 있을 뿐이지ㅋㅋ 읽어 보고 각자 잘 생각 해보자.
일단 고려 국경사의 연혁을 요약해 보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음.
즉 태조 왕건이 요하 부근을 관념적 경계로 하는 신라의 영역을 그대로 계승해서
광종 때 2주를 확장하고, 성종 때 8주를 확장하고, 문종 때 11주를 확장하고, 예종 때 9성을 설치하였는데, ↓
① 태조
"최승로가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왕건)께서... 요하(遼河)와 패수(浿水: 고조선 때 요동의 경계)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秦韓: 신라)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瀛]를 통일하셨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해가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자 그 나라 세자인 대광현(大光顯) 등이 우리나라[고려]가 의(義)로써 흥기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영토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② 광종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 숙여진의 잘못)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척주)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거란]이 고구려[구고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고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서희』
③ 성종
"『고려사절요』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는 서희 장군이 994년과 996년 사이에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龜州)·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선주(宣州)·맹주(孟州) 등 8개 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고려사절요』나 『동사강목』의 기록에 대하여 오기이거나 다른 이칭 중복 기재 등으로 보고, 중국 『宋史』의 기록을 근거로 6州를 정하였다. 그런데 뒤에 자세히 다루거니와 우리나라의 기록을 부인할 특별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宋史』를 근거로 6주로 축소한 것은 문제가 있다. ··· 서희 장군은 거란과 담판하여 모두 8주를 개척하였으나 귀화진과 장흥진을 특별한 사유도 없이 오기로 보아 제외하고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 등 6주를 이른바 '강동6주'라 이름 붙여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 지역으로 설명하여 왔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거란의 3차에 걸친 침략 시의 군사 이동 상황과 평안도의 지명 지리를 비교하여 보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압록강 남쪽의 지명 다수가 요령성 요양과 개원 사이에서 같은 이름으로 있는데, 고려와 거란군의 군사행동을 요령성으로 옮겨 보면 지리적으로 상당 부분 부합된다. 따라서 서희 장군이 개척한 8주는 현재의 압록강 남쪽이 아니라 요령성 요하 상류의 남쪽 개원시 일대와 요양시 이북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中, 남주성 한양대 겸임교수〉
④ 문종
"〈귀부해 온 동여진인들을 귀순주에 소속시키다〉··· 9월 갑진 한림원(翰林院)에서 아뢰기를, “동여진(東女眞)의 대란(大蘭) 등 11개 촌의 내부자(內附者)들이 빈주(濱州)?이주(利州)?복주(福州)?항주(恒州)?서주(舒州)?습주(濕州)?민주(?州)?대주(戴州)?경주(敬州)?부주(付州)?완주(宛州) 등 11개 주(十一州)가 되기를 요청하니, 각각 주기(朱記)를 하사하고 귀순주(歸順州)에 소속시키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4일 기사』
⑤ 예종
"이지형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舊疆)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 12, 효종 5년 6월 4일 임술 3번째 기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동아출판, 33p) ☞ 고려는 개국 이래로 이렇게 꾸준히 영토를 확장해 왔는데, 정작 한국사 교과서에는 고려가 제국으로서 지니고 있었던 해동천자의 관념을 추상적으로 제시만 했을 뿐, 500년 고려의 영토 변화를 제대로 설명한 것이 단 하나도 없음. 이 지랄맞은 교과서 덕분에 정규 교육으로 역사를 배우는 이들은 해동천자관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구성원은 누구누구였으며 어떠한 정체로 운영되었고 그 영역은 어디까지였는지 등 실체에 대한 파악을 개략적으로도 하지 못한 채 '걍 고려가 주제넘게 황제 놀이 좀 했었나보다' 하는 식의 축소 지향적 역사관을 강제 주입 당하는 골 때리는 상황.
위에 있는 자료만으로 교과서의 고려 영토가 잘못됐다고 단정짓기엔 근거 기록이 조금 더 필요하다 싶어?
그럼 한번 추가 자료까지 볼까? 앞서서 강조했 듯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서 각자가 스스로 "판단"이란 걸 해보자고. ↓
(1) "우리(我)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 태조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고려사 지리지, 서문》
(2) "고려가 다스리는 주군(州郡)은 모두 580여 개였으니, 우리나라[東國] 지리(地理)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極矣)를 이루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ⅱ》(3) "(고려의)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요하(압록)를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ⅲ》
(4) "대상(大相)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관헌(官憲) 등에게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여러 제후국(諸蕃)의 정예 기병(勁騎) 9,500명을 거느리게 하며..." 『고려사, 태조 19년 9월 8일 기사』
(5) "고려의 왕건(王建)이 신라와 백제[후백제]를 격파하니,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 18, 고려조』
(6) "철리국(鐵利國)에서 사신을 보내 예전처럼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다." 『고려사, 현종 12년 3월 23일 기사』
(7) "동여진(東女眞)의 대상(大相) 쾌발(?拔)이 자기의 족속 300여 호를 인솔하여 내투(몸으로 와서 항복)해 왔으므로, 발해(渤海)의 옛 성터를 하사하고 그 곳에 살게 하였다."『고려사, 현종 20년 8월 9일 기사』
(8) "거란(契丹)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 동북여진(東北女眞)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 17년 윤 5월 19일 기사』
(9) "거란이 여진국(女?國)을 정벌할 때에 길이 고려의 땅(高麗之界)을 거치게 되자" 『송사 제487권 열전 제246 외국3, 고려전』
(10) "거란(契丹)이 여진(女眞)을 칠 때 우리[고려] 영토(我境)를 길로 삼았는데" 『고려사, 성종 4년 5월 미상 기사』
(11)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제후국 백성(蕃人)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영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해 오면서 우리[고려]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고려사, 문종 27년 4월 3일 기사』
(12)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기사』
(13)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파견해 금(金)을 찾아갔다. 그 서(書)엔, “심지어 네 근원[금(金)]은 내 땅[고려(高麗)]에서 발(發)한 것이다(?彼源發乎吾土).”란 말이 있어 금주(金主)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고려사, 예종 14년 8월 3일 기사』
(14) "요심(遼瀋) 지역은 애초 본국[고려]의 옛 영토였으나 원나라를 섬기게 된 이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기사』
?(15) "명(明)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기를...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고려사 권 137 열전, 우왕 14년 2월 미상 기사』
(16) "요하(遼河)의 동쪽에 따로 한 천지[해동천하]가 있으니, 우뚝 솟아 중국과 다르게 나뉘어 있네." 『제왕운기, 하권』
그 렇 다 면, 이 광활했던 고려(Korea)의 강역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상실하게 된 걸까?
정답: 1차적으로는 금나라가 고려로부터 독립, 발흥하던 시기에 독자적인 제국으로서 견지했던 해동천하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결정적으로는 이성개가 조선을 세우면서 반역의 정당성을 인정받고자 서북 영토(요심)의 영유권마저 완전히 중국에 팔아 넘겼던 것이다. ↓
[이들(조선 개국 세력)은 철저히 사대사관에 입각해서 《고려사》를 편찬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에 대한 영유권이 불투명해진 점, ⓑ정권의 안정을 위해 중화 왕조에 대한 사대(中華事大)가 절실해진 점, ⓒ중국의 충실한 신하국(下國)으로서 더 이상 제후국(藩國)의 존재가 필요 없게 된 점 등에 착안하여 전조[고려]가 영유하던 북방 강역 대부분을 중국에 넘겨주고 국경 분쟁 없이 최소한의 현상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 결과 〈고려실록〉에 존재했던 여진 기미주(??州) 영토에 대한 기록이 대거 삭제되어 일부 파편만 남게 되었으며, 고려 서북계(西北界)의 기준이 되는 요하 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압록【鴨?】을 전부 압록【鴨綠】으로 개변해 버렸다. 그렇게 수 세기가 흘러 성리학 근본주의(性理學 根本主義)가 절정에 달한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반도사관(小中華 半島史觀)이 굳어진 채 나라가 망조에 이르자 일제가 이를 식민통치(植民統治)의 수단으로써 기정사실화 한 것이다.
쓰다 소우키치(일제시대 관변학자)가 말하기를,
"조선인들은 거짓말을 잘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서희(고려 전기의 명신이자 외교관, 국정 설계자)
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금 실증하여 고려의 국경을 밝히겠다"라며 고려 영토를 자의적으로 획정하고 끼워 맞춘 것인즉 그 의도야 더 이상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한줄 요약: 이성개와 김일성은 사지를 찢어발기고 부관참시를 해도 모자랄 민족사 최악의 역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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