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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 | 22/10/10 16:37 | 추천 34

약 1천 년 전 당대 고려인들이 금나라를 바라보던 시각 +14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43769137


과거 우리 역사에서 중국을 상대로 갑질을 한 유일한 시기라면, 흔히들 현종과 강감찬이 이끌었던 귀주대첩 이후의 "고려"를 꼽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 런 데, 당대 고려인들이 중국 한족의 송나라 뿐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영토를 만들어준 여진족의 금나라를 상대로도 갑질?을 했다는 소리, 혹시 들어본 적 있음..?
 

 [완안부가 금나라를 세운 후, 고려 조정은 개경 귀족들과 이자겸 정권의 안정을 위해 주변국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고 무의미한 국력의 손실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국가의 실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명목상 금을 상국으로 대접하긴 하였으나, 《고려사》 및 〈당대의 묘지명〉 그리고 《금사》에 실려있는 다음의 기록들을 들여다보면 고려에서 실상 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1] 장사 1천 명만 주면 금 황제를 잡아 바치겠다는 최봉심 

직문하성(直門下省) 안직숭(安稷崇), 우간의(右諫讓) 이신(李伸), 중서사인(中書舍人) 임존(林存), 좌사간(左司諫) 최함(崔?) 등이 아뢰기를,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의 서장관(書狀官) 최봉심(崔逢深)은 본래 무예로 선발된 사람이므로 서장관은 그 직책이 아닙니다. 또 그는 일찍이 ‘나라에서 나에게 장사 1천 명만 준다면 곧바로 금으로 들어가서 그 국주(國主: 금 황제)를 사로잡아 바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습니다. 그 광망(狂妄)함이 이와 같으므로 괜히 일을 만들까 두려우니 사신으로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권16 세가 인종(仁宗) 9년 9월》




[2] 금나라의 칭신 요구를 극구 반대하는 윤관의 아들 윤언이

바야흐로 금(大金)이 전성기를 맞아 우리 나라를 신하라고 부르게 하고자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어지럽게 논의하였는데, 공이 나서 간쟁하여 말하였다. “임금이 환난을 당하면 신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니, 신하는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고려)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 고려의 천자를 배알)해왔습니다. 그 호적이 모두 아조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때에 권신 이자겸이 임금의 명령을 제 멋대로 정하여 금에 신하를 칭하면서 서약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진정 인종의 맑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공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슬퍼하였다.

〈윤언이 묘지명 中〉




[3] 압강을 공격해 금나라의 보루를 불태우고 부숴버린 고려군 

1164년 압록강 보루가 (고려의) 침략을 받아 불타고 훼손되었다. 1165년 1월 세종 황제는 고려 신년축하 사절이 공무를 마치고 귀국하겠다고 인사를 오자 책망하기를 “변방에서 고려군의 사소한 침략이 많은데, 그대 임금이 시킨 것이냐? 아니면 지방 관원들이 저지른 짓이냐? 지방관들의 짓이라면 너희 임금이 막아야 할 것 아니냐?”라고 나무랐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4] 금 황제에게 신년 축하 예물로 옥대 대신 돌대를 보낸 고려 

1177년 신년 축하 예물이 왔는데, 옥대라 하였지만, 옥은 아니고, 옥같이 생긴 돌로 만든 것이었다. 담당 관서에서 고려에 문서를 보내 질문하려고 하였는데, 세종 황제가 “저 소국은 옥을 식별하지 못해 옥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문서를 보내 따질 필요 없다”라고 하면서 질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5] 제 맘대로 무기를 들고 국경에 진입 / 대열을 벗어난 고려 사신

그해 12월 담당관이 보고하기를, 고려 사신으로 따라온 하급 압마관(押馬官) 순성(順成)이란 자가 무기를 차고 3번씩이나 대열을 벗어났다고 하니, 세종 황제가 이르기를, 사신이 중대한 죄를 저지른 일이니 고려에 알려 그 나라에서 처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6]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금 사신을 입국 지연시킨 고려 조정

1183년 왕호(王皓: 고려 명종)의 어머니 임씨(任氏)가 훙서하자 왕호가 생일 축하 사절 및 하례·회사 등의 파견을 그만두게 해 줄 것을 청하므로, 조서를 내려 그 청을 따랐다. 1189년 장종 황제가 즉위한 후, 사신을 보내면 국경에서 지나치게 지체시킨다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니, 고려가 깊이 사과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7] 역참에서 일하던 금나라 사람을 때려죽인 고려 사신단의 하급 관리...

1192년 (고려 사신단의) 하급 관원 김정(金挺)이 돌아가는 길에 평주(平州) 무녕현(撫寧縣)에 이르러, 역참에서 일하는 하첨아라는 자를 때려죽였다. 이에 담당관서가 주청 하기를 "고려 사신이 오고 갈 때 적정한 숫자의 감시병을 붙여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8] 금나라 황제가 거하는 대궐 복도에서 휴대용 칼로 꿀배를 깎아 먹은 고려 사신

1204년 1월 1일 을축일 고려 사신의 하급 수행원이 대궐의 복도에서 패도(佩刀: 작은 검)를 꺼내 배를 깎으며 내려가는 것을 봉직관이 발견하여 그를 규탄하였다. 장종 황제가 접반 관원을 불러 앞으로는 문서를 주어 그러한 행위를 엄금하도록 지시하라 하였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9] - 금사 고려전 사찬 - 

사관이 찬(贊)하여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은 본래 말갈(靺鞨) 중에서 고려(高麗)에 부속된 자들이다. 처음에는 이웃 나라로서 우호를 통하다가 얼마 후에는 군신(君臣)이 되었는데, 정우(貞祐) 연간(1213~1216) 이후에는 도로가 통하지 않아서 겨우 한두 번 보았을 뿐이다.

《금사, 권135 열전73 고려(高麗)》


 


 

 
당대 고려인들이 금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은, 마치 영국인들이 초기미국을 바라보던 시각과 비슷했던 듯. 





 

한줄 요약: 어후 고려시대는 진짜 파면 팔수록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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