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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 | 22/09/09 22:46 | 추천 28

조선 후기] 조선에게 고려라는 나라가 얼마나 넘사벽이었는지 시인한 기록들 +7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38287550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조선]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첫번째 기사』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6일 병자 4번째기사』

 


 

"이지형이 상소하기를, 북로(北路)의 형세는 남방 열읍(列邑)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산으로 막히고 바닷가에 위치하여 마치 긴 뱀과 같은 모양으로 곧장 2천여 리에 뻗어 있습니다. 전조[고려] 때 윤관(尹瓘)이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무수한 전투를 벌인 뒤에 겨우 옛 강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정하여 푯말을 세웠는데, 북쪽은 선춘령(先春嶺)에 이르고 남쪽은 소하강(蘇下江)에 닿았습니다."

 

『효종실록 12권, 효종 5년 6월 4일 임술 3번째기사』

 


 

"이집이 강화의 그림을 바치고 이어서 말하기를, 고려 때의 토성(土城) 터가 아직 남아 있는데, 돌보다 단단하여 대포(大砲)라도 깰 수 없습니다. 하고, 김덕원이 지도(地圖)를 가리키며 형세의 편부(便否)와 도리의 원근(遠近)을 자못 상세하게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고종(高宗)이 40여 년 동안 강도에 들어가 토성으로 적병을 방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을 쌓는 일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겠고, 병자년에 부성(府城)이 있었다면 함몰(陷沒)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내성(內城)도 없어서는 안되겠다."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9월 12일 기해 4번째기사』

 

 

 

"고려조(高麗朝)는 본질적 바탕(質樸)을 숭상하였고 또 나라를 세운 과정의 어질고 후덕(仁厚)함이 한대(漢代)와 같았기에, 비록 암우(暗愚)한 것이 원종(元宗) 같고 나라 형편이 이와 같았지만, [고려]백성들이 한(漢)나라 백성들의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쇠퇴기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망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조선]는 문채(文采)를 숭상하였으나 지금은 문(文)도 아니요 질(質)도 아니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영조실록 28권, 영조 6년 12월 11일 을사 1번째기사』

 

 

 

"이양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의 군제(軍制)는 6위(六衛)와 8령(八領)으로 되어 있었는데, 1령이 각각 1천 인이니, 도하(서울)의 군대만 모두 합쳐 4만 8천 명 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조선]는 훈국(訓局)을 새로 설치한 뒤로 5영(五營)의 군대를 제외하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니, 이것으로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1월 2일 경자 5번째기사』

 

 

 

"들은 것을 따로 적은 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그리고 더욱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수레 이용인데 우리 나라[조선] 영문(營門)에서 쓰고 있는 큰 수레는 애당초 중국 것을 본뜨지 않았기 때문에 소나 말의 힘은 곱 이상이 들면서도 쓰기에 아주 불편합니다. 혹자는, 우리 나라 지형이 수레를 이용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고려 현종(顯宗) 때 강조(康兆)는 검거(劒車)를 이용하여 거란을 격파했고, 선종(宣宗) 때 유홍(柳洪)은 병거(兵車)를 이용해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정조실록 53권, 정조 24년 3월 9일 신유 1번째기사』

 

 

 

"내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보니, 군신 상하가 음란하고 방탕하고 요괴하고 허탄한 정상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므로, 그 풍속과 인재가 옛과 같지 않은 것을 의심했다... 그러나 이따금 호걸스럽고 재덕이 있고 기예가 있는 사람이 뛰어나서 일세의 영웅이 된 자가 많았으니, 고려조의 인재와 풍속을 가히 상상할 만하거늘, 역사를 만드는 자가 승국[勝國: 고려]을 헐뜯고 깎는 데에만 힘써서 그 사실이 묻히고 말았다."

『이덕형, 송도기이』

 



"고려 때에는 관에서 축내는 폐단도 없었고 정기적으로 바치는 부세도 백성에게 맡겨서 모두 정도에 알맞게 하였다. 말과 섬도 공사 간에 똑같은 제도로 했고, 혹 흉년을 만나 진휼할 때는 동서로 대비원(大悲院)과 제위포(濟危鋪)를 설치하여 질병 환자를 치료하였다.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해서는 모두 관에서 구휼하고 이외에 온갖 불구자에 대해서도 다 국가[고려]에서 부양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백성에게 우대하는 정사가 지금[조선]에 비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익, 성호사설 제24권』

 

 

 

"생각해보면 고려에서 나라를 세운 이래 물력의 풍부함은 우리 조선이 거의 미치지 못할 바이다. 석물을 세운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바다[고려]를 보고 나면 다른 물[조선]은 시시하게 보인다더니 정릉의 석물을 보고 나니 길가의 소소한 석물들을 마주칠 때마다 저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유만주, 흠영』



 

높을 [고] 수려할 [려]

→ 아득히 높고 수려한 나라, [고려]


 

 


 
두줄 요약: 고려가 우월하니 조선이 우월하니 서로 시시콜콜 떠들어댈 필요가 없다.

당시 기록에 찾아보면 다 나와 있기 때문. 조선은 의외로 주제 파악은 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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