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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키 스님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 740명의 조선인 징병군을 지휘하던 일본군 학도병이었음.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으로,
후지키 스님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강제노역을 하는 이들에게 "일본이 곧 패망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다독였다고 한다.
밤에는 곳곳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같은 것이 들렸는데 알고보니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르는 소리였다. 뜻도 모르는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전우애를 다졌다.미국 점령지에서 먹을 것을 훔치려다 총상을 입게 된 그는 미군 포로로 붙잡히게 됐고,
가까스로 탈출해 전우들에게 돌아왔지만 이미 모두 숨진 뒤였다.
혼자 살아남은 그는 몸을 한국을 향해 뉘인 채 숨진 조선인들을 바라보며 영혼에 약속했다.
'당신들의 유골을 기어코 조국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말이다.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지만 미군에게 저지 당했고, 스님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곧장 머리를 깎았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장에서 어렵사리 시신을 수습했지만 일본 정부가 당시 숨진 사람들과 합사해버리면서 결국 약속을 지키기 못했다.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 1만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한국인 위령탑'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한국 정부와 레슬러 역도산 등의 도움을 받아
1975년 드디어 한국인 위령탑을 세웠다. 한국 각지에서 공수해온 돌을 쌓아 분묘형태로 만든 탑 옆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비석도 세웠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 곳곳 사찰에 흩어져있는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마음 먹은 그는 2014년 92세의 나이로 숨지기 직전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봉환 사업을 추진했다.자신의 유골을 '평화의 섬' 제주에 묻어달라던 그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한국인 전우들의 영혼과 함께 잠들고 싶다. 전우들의 한 맺힌 영혼들을 제주로 꼭 모셔와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결실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오는 3월 1일 처음 맺어지게 됐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숨진 전우들을 바라보며 조국으로 보내주겠단 약속을 한 지 74년 만이다.개인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았던 봉환 사업은 지난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하 민화협)와 북측 민화협이 뜻을 모으면서 속도를 냈고, 일본 통국사에 있던 유골 74위(남측 70위·북측 4위)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후지키 스님의 유골이 안치된 선운정사의 주지 지율스님은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인 관계를 떠나 평화의 섬 제주에서 모두 모이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골 74위는 오는 27일 일본을 출발해 3월 1일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추모식을 가진 뒤 그날 저녁 제주에 올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민화협은 유골의 신원을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74위에 대한 명단을 행정안전부에 전달했으며, 향후 지속적으로 봉환사업을 추진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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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일본정부에서도 참 귀찮은 존재였고, 한국좌파입장에서도 정말 불편한 존재였음.
하지만 좌우파를 떠나서 마음속에서 존경받으시던 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