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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관리.. | 22/06/21 22:56 | 추천 37

[정보] 일본의 섬노예 사건 - 정(情)이라는 이름의 섬 +16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2249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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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접국가인 7시의 염전 노예 사건들을 보고 미개하다고 극딜하는 일본이지만, 그런 그들도 예전에는

 

엄연히 섬노예를 쓰고 있었던 나라야.

 

이 사건은 나사케지마(情島 - なさけじま) 한자로 '정' 이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서 벌어진 비정한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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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3년 (昭和23) , 서기 1948년 7월, 세토내해(???海) 에 떠있는 야마구치현의 야시로지마 (屋代島) 에

 

초췌한 몰골을 한 19세, 17세의 소년들이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어.

 

이들은 맞은 편에 있던 나사케지마(情島)에서 조업 중인 어선 등에서 노를 젓는 등, 강제노동을 하던 노예 소년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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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나사케지마에는 카지코(梶子 - かじこ) 라 불리우는, 어선의 키를 잡거나 노를 젓는 역할을 아이들에게 맡기는

 

풍습이 있었어.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가난한 집 아이들을 사다가 3-5년 정도 부려먹고 내보내곤 했는데, 패전 이후 더욱 일손이

 

부족해지자, "물고기를 배터지게 먹게 해주마(魚をたらふく食わせてやる)" 같은 말로 데려온 뒤 통수쳐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시키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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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노예 소년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1시가 되서야 잠이 드는 강제 노가다충 생활을 매일 지속해야 했고, 조업을 완전히

 

쉬는 일부 명절을 제외하고 쉬는 날은 존재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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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매일 지속되는 가혹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식사를 주지 않아서, 당초의 물고기를 배불리 먹여주겠다는

 

이야기는 다 거짓부렁이었고, 영양실조로 나날이 여위어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물론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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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두 소년의 발견으로 이 사건이 지방 신문에 알려지고, 경찰과 정부의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지.

 

이 때 당시 발견된 노예 소년 들의 수는 약 50명. 지금의 나사케지마의 인구가 13명인데 비하면 많은 숫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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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각자의 사연도 기구했는데, 빚을 갚지 못해 아이가 부모의 차금 대신 팔려온 경우, 전쟁 고아인 경우, 심지어는

 

소년원(그 당시의 감화원-感化院-) 이나 고아원에서 원장의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비밀리에 섬으로 팔아넘긴 경우

 

등등 근대화 된 사회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줄줄히 터져나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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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해당 사건으로부터 2년 정도 전에 한 소년을 우리에 감금한 뒤 굶겨죽인 사건도 발각되었지.

 

감금한 범인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모든 정황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섬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행정관계자나 기자, 경찰들조차 이 사건을 이해하는 "척" 을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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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이후 일본도, 천조국 성님들에게 "기브 미 쪼꼬레또" 를 외치며 응딩이를 다라다니던 상황이고, 모두가 빈곤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는 사고 방식이 강했고, 당연히 전쟁 고아들도 넘쳐나는 상황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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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섬노예 소년 하나 둘 쯤 굶어 죽는 것이 무'슨 상'관 이냐는 분위기가 강했고, 하다 못해 변변치 않아도

 

밥이라도 주는 게 어디냐며 이런 섬노예를 "필요악" 으로 까지 보는 인식이 강한 상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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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서 정부가 해준 것은 12세 이하의 아동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말 것, 의무 교육을 받게 할 것, 법에 의하지 않은

 

사형(私刑)을 하지 말 것을 문서화 한 것에 불과했고, 섬노예 소년들을 이용한 어업 활동은 그대로 유지되었어.

 

굶겨죽인 1명의 소년 이외의 소년들에 대한 강제 노동 등은 전부 불문에 부쳐졌고, 실제로도 형사 사건화 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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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10여명의 소년들은 섬을 떠났지만 대다수의 소년들은 섬에 남았어.

 

섬을 떠나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도,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지.

 

이렇게 종결되는 줄 알았던 섬노예 사건은 3년 후인 1951년에 학대를 견디지 못한 5명의 소년들이

 

탈주함으로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그 사건 당시 정부의 지도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정부가 묵인하는 모습을 보고 강제 노동 등 대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밝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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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소재로 NHK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카지코(舵子) 라는 대하 드라마를 만들었고, 1957년에는 분노의 고도 (怒りの孤島)

 

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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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사케지마 외에도 이 당시 일본의 농촌이나 어촌 들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한 가혹한 노동이 강요되는 사건들이

 

각 지역 풍습으로 남아 있었어.

 

오키나와 이토만 지방의 이토만우리(???り - いとまんうり)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慶良間諸島)의 케라마우리 (慶良間?り)

 

오키나와의 빈농이 부농에게 자식을 노동력으로 파는 인쟈(インジャ)

 

미야기 현(宮城?) 의 모라이코(モライコ) 

 

등 각 지역에서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도시로 노동력이 이동하고, 한국 전쟁 등의 특수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는 60대 중 후반까지 사라지지 않았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노예 사건도 올릴게.

 

 

요약.

 

1.  1948년 나사케지마(情島 - なさけじま) 에서 섬노예 소년들이 발견되고, 경찰과 정부의 조사가 있었으나

당시 패전 직후의 일본은 모두가 가난하다는 생각에 감금 후 굶어죽은 소년 1명에 대한 사건 이외에 처벌 없이 종료.

 

2. 3년 후 섬노예 소년들 탈출, 정부와 경찰의 권고는 다 무시하고 섬노예 유지 ㄱㄱ.

이 사건이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만들어짐. 

 

3. 오키나와는 물론 각 지방 어촌, 농촌에서 인신매매에 해당하는 관습이 성행하였고, 60년대 중후반까지 이 풍습들은

사라지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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