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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dol55 | 22/06/09 09:31 | 추천 28

송해(1927년 ~ 2022년 6월 8일) +3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19666554

송해(宋海[1], 본명: 송복희(宋福熙), 1927년 4월 27일 ~ 2022년 6월 8일)는 대한민국가수이자 방송인이었다.[2] 또한 송해는 대한민국의 최고령 연예인이었으나, 향년 95세로 사망했다.158cm, 54kg[5], A형 취미는 운동, 목욕[6]이다/ 같은 이북 출신의 배우 신영균보다 1년 6개월, 조순서울특별시장보다 1년 가까이 일찍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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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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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여산이다. 창씨개명 당시 일본식 이름은 키무라 후키(木村福熙).어릴 적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형은 자신이 해주예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고 집을 나갔다고 한다.1949년 황해도 해주예술전문학교[15]에 만 22세 나이로 입학해서 성악을 공부한 바 있었다. 이학교는 1946년에 설립되어 당시 북한 지역 유일의 음악대였다.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본래는 '창공악극단'이란 이름의 순회 악단에서 가수를 했는데, 악단 공연의 특성상 진행을 하면서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MC 경험을 쌓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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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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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평양 국립음악학교(현재의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졸업 발표회에서 노래를 시작했다.다만, 학업은 오래가질 못하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초기에는 고향에 머물렸는데,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는데, 1.4 후퇴가 벌어지던 때에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가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두고온 어머니와 여동생을 평생 그리워했다. 바로, 북한 인민군의 진주로 인해 재령에서 해주, 해주에서 연평도로 피란을 떠나 연평도에서 미 군함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 때부터 지금의 이름 즉, 실향민으로 바닷길을 건너오면서 바다 해(海) 자를 예명으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6] 피난선이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가 군에 입대해서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통신문'1953년 7월 27일 10시를 기하여 모든 전선에 전투를 중단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휴전 전보를 직접 알렸다고 밝혔다.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였던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시켜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인 석옥이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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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연예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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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8개월의 군 제대 이후에는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으며,TV 방송이 시작한 후에는 여러 방송사를 넘나들면서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다. 당시엔 정극 배우든 희극 배우든 방송국 전속으로 활동하는 게 대세라서 이적이 쉽지 않았으나 송해는 비교적 방송사들을 옮겨가며 활동한 편이었다.1960년대 동아방송에서 '스무고개'와 '나는 모범운전사'에 출연했다. 특히 '스무고개'에선 코미디언 박시명(1924~1986)과 콤비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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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에서 단역으로 영화 배우로 데뷔했다. '송해'(宋海)라는 예명은 월남 과정에서 타고 있던 선박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와 같은 세상을 품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1] 가수로서의 대표곡은 《나팔꽃 인생》, 《신명나는 세상》, 《유랑청춘》, 《내 인생 딩동댕》 등이 있으며 개그맨 서인석과 함께 《꽃청춘》을 함께 부를 예정이었으나[4]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무산되자 서인석 단독으로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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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의 본업은 코미디언으로, 웃으면 복이와요, 고전 유모어극장, 유머 1번지, 코미디 하이웨이[13] 등에 출연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코미디언 활동은 하지 않고 있으며 오랫동안 MC로 활약하고 있었다다양한 예능을 가져야 하는 악극단의 특징 덕분에 만능 연예인으로 자라[3] 여러 무대 및 방송에 출연했고, 1능수능란한 화술과 진행능력 그리고 정확한 발음을 가진 그는 동양방송이 매일 아침 AM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영하던 생활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21]의 진행을 맡으면서 운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1988년 5월부터 한국방송공사(KBS)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이끌며 ‘국민 MC’로 불렸다.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이한필을 시작으로 이상용, 고광수 아나운서, 최선규 아나운서 등에 이어 MC를 맡았다. 이밖에 송해는 KBS 2TV 드라마 ‘싱글네 벙글네’(1981)와 KBS 2TV ‘나를 돌아봐’ MBC TV ‘세모방 : 세상의 모든 방송’, TV조선 ‘부캐전성시대’ 등 예능물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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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교통 사망사고의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17년 동안 맡아온 '가로수를 누비며'[진행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이 때가 이미 5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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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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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참여한 프로그램이 1988년부터 2022년까지 MC로 활약[23]하고 있는 전국노래자랑이다. 전국노래자랑 5월 경북 성주 편부터 자리를 지켰다. 33년 동안 진행하여 한국의 현역 방송인 역사상 가장 장수한 최연장자이며, 국내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를 기록했다. 이후 6년간 ‘전국노래자랑’의 MC를 맡았고, 잠시 하차했다가 1994년 복귀해 현재까지 진행을 맡고 있다. 공개 녹화를 통해 무려 1000만 명 넘는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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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이면 어김없이 실로폰 소리에 함께 시청자들을 찾았다. “전국에 계신 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국내외 모든 근로자 여러분들, 원양 선원 여러분, 또 이역만리 해외에서 내일의 희망 속에 열심히 살아가시는 해외 우리 동포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오프닝 멘트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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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 미국, 평양(2003년)에서까지 공연했다. 2003년 8월엔 '전국노래자랑' 광복절 특집으로 평양 모란봉 공원 야외무대에서 북한 진행자 전성희와 공동 사회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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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에서 스타가 된 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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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거쳐서 스타가 된 사람들이 많다. 김혜연, 박상철, 홍석천, 송소희, , 승희, 송가인, 임영웅, 이찬원, 정동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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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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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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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어른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80살이 돼도 90살이 돼도 여전히 "송해 오빠"[28]로 불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요일의 남자"이면서, 이 외에 앨범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연 적도 있을 만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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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꾸준함은 송해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높였다. 송해와 비슷한 연배에서 송해는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곽규석 등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사람들과 직접 살을 맞대며 90세를 넘기고 활약하였고, 별다른 잡음도 없이 생활하여서, 이제는 그들에게 가려진 2/3인자가 아닌 어엿한 1인자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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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15

2022년 1월 31일에는 KBS 2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인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가 방영되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월 1일에 평소 송해가 본인 다음으로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으면 좋겠다고 밝히던 허참간암으로 72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로부터 137일만인 2022년 6월 8일 송해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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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등재

2022년 5월 23일에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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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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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는 백신을 3차까지 접종했으나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 이에 많은 네티즌이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상기 내용이 무색하게도 4월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하며 MC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떴다. 송해, ‘전국노래자랑’ MC 복귀 “9일 녹화 참여”

2022년 5월 14일 오후에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2022년 5월 17일 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송해 스스로 “더 이상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는 게 어렵지 않겠느냐”라는 뜻을 프로그램 제작진에 밝혔다고 한다.‘전국노래자랑’ 측에 "건강에 자신이 없어 이제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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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2022년 6월 8일 오전 8시 45분에[31] 도곡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식사를 하러 올 시간이 지나 인근에 사는 딸이 자택으로 찾아갔으며, 이후 자택 화장실에 쓰러져 있던 송해를 발견해 신고하였다. # 소방당국은 오전 8시 19분쯤 유족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송해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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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공원과 송해길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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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은 2016년 말까지 옥포읍 기세리 옥연지 일대에 송해공원조성한다고 밝혔다. 원래 이 공원은 옥연저수지를 이용한 단순한 경관 공원으로 조성키로 했으나, 2011년 달성군 명예 군민, 2012년 달성군 명예 홍보대사 위촉 이력이 있는 데다가, 부인 석옥이가 이 곳 출신인 점[36] 등을 활용해 송해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출신이라고 한다. 기세리는 전체 40여 가구의 주민들 모두가 석씨인 충주 석씨 집성촌으로 알려져있다. 달성군수에게 '사후에 부부가 처가 쪽에 묻히겠다.'는 뜻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83년에 장인과 처남의 묘소가 있는 옥포읍 기세리에 유택 차원의 526㎡ 규모 토지도 매입했다고 한다. 달성군은 공원 명칭 및 성명권, 초상권 사용에 대한 협의와 관련, 본인이 최종적인 동의를 해 옴에 따라 공원 착공에 나서기로 했다. 송해 공원에는 산책로를 비롯해 쉼터, 송해 흉상 등이 들어설 예정이며 방문객이 산책로를 거닐면 공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송해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송해 사후엔 여러 유품을 모은 '송해 기념관'을 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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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는 그의 이름을 딴 '송해길'이 있다. 그 곳에는 송해의 흉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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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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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장수의 비결 중 하나가 'BMW'라고 밝혔다. 물론 자동차 브랜드 BMW가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BMW란 BUS, METRO, WALKING을 말한다. 심지어 노년층들 사이에선 아직은 수요가 많다는 피처폰조차도 없다. 이때문에 나를 돌아봐에서 이경규가 자신이 만든 영화 전국노래자랑에서도 가장 섭외가 힘들었다고한다.또 하나의 장수 비결은 치과로,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은 치과에 간다고 한다 다른 장수 비결은 우거지와 우거지국밥 소고기를 좋아한다], 매일 16시에 대중 목욕탕에서 새로운 물로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22시에는 잠을 자려고 애쓰고 아침식사는 꾸준히 잘 챙겨 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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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과거에 매우 심한 골초였다고 한다. 30대 중반까지는 하루도 담배 없이는 못 살 정도로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고 하며, 담배를 무려 3갑 ~ 4갑이나 피웠다고 한다. 그 당시 병원에 찾아갔을 때 의사로부터 폐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듣고도 병원 옆 동산에 올라가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 순간 '이걸 계속 피우면 죽는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성공적으로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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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예계가 다 아는 대단한 주당이라고 한다. 이용식, 김학래 등의 후배 연예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송해 선생님과의 술자리'라고 할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퀴즈쇼 사총사에서 자신의 주량이 소주 다섯 잔이라고 했지만, 김인협 악단장이 소주 5병이라고 증언하였다 요즘도 약주를 하냐는 질문에 “그거 빼면 사람이 심심해서 안돼”라고 답했다. “술 한잔하면서 마주 앉은 사람은 다 행복한 친구”라고 부연했다.술 마신 다음에는 꼭 우거지 국밥으로 해장을 한다고 밝혔다. 2000원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송해가 생전에 즐겨 찾았던 우거지 국밥 가게가 있는데, 무한도전 방학특집에서 이 가게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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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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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평소 송해는 오토바이를 사달라는 외아들 故 송창진 씨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결국 송해의 아내가 남편 몰래 외아들에게 오토바이를 사 주었는데, 대학교 2학년이던 20세의 외아들은 1987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 송해는 한남대교로는 지나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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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0일 부인 석옥이(石玉里) 여사가 (1952년 결혼 ~ 2018년 1월 20일 별세) 지병인 폐렴이 악화되어 별세하였다. 유족으로 .장녀 송숙경, 차녀 송숙연,사위 김학수, 양희천, 외손주 김혜림, 양정우, 양정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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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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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전국 노래자랑이다보니 괴짜 참가자들도 한두 번씩 출연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 2010년에 온 몸에 벌들을 붙이고 나온 양봉업자가 있었다. 이때 송해가 보여준 대처 능력은 관록. 동시에 대인배 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방송 직후에 KBS 시청자 게시판은 송해 선생님을 찬양하는 글과 저런 사람을 왜 내보냈냐는 글이 반반이었다.


송해는 최고령 참가자였던 115세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그는 “귀만 조금 어두우실뿐 아주 카랑카랑하셨다”며 “산책을 많이 다니신다더라. 쉴 새가 없어 건강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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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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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래전부터 이상벽을 마음속으로 정해놨다”며 “이상벽이 ‘전에 자리 넘겨주신다고 약속하신 건 어떻게 되냐’고 묻더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 30년 더 기다리라 했더니 ‘그럼 제가 90살이 넘는데요’하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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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관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에 대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을 풀려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남자 대통령들만 자꾸 나오니까 서로 싸우고 뒷얘기가 많아서 안되겠다, 여성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지지를 선언한 바 있다. # 최태민이 세운 새마음봉사단 활동 중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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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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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 방송에 나와 회당 300만 원씩 출연료를 받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국 노래자랑>은 매주 일요일마다, 즉 한 달에 네 번 방송되기 때문에 월 1,200만 원을 받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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