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태 연구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이수곤(69)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가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국내 재난관리시스템의 현실과 재난 인명피해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정책제안'을 전달했다. 이 제안서에는 높이 50m, 길이 300m의 수직 옹벽 바로 앞에 들어선 경기 성남시 백현동 '판교A아파트'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백현동 '판교A아파트'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성남시장 시절 인허가 과정에서 특혜 의혹이 불거지며 지난 3월 대통령 선거 기간 주요 쟁점이 됐다.
10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난 이 교수는 "1200여 가구에 달하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옹벽에 대한 안정성 재검토가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2017년 설계 심의 과정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백현동 '판교A아파트' 인허가 특혜 의혹은 지난해 5월 중앙일보의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구(舊) 한국식품연구원 부지에 들어선 이 아파트는 인허가 과정에서 유례없는 4단계 용도 상향(자연녹지→준주거지)이 됐다.
사업 시행사는 고도제한(성남공항 인접)으로 아파트를 일정 높이 이상으로 지을 수 없어 무리하게 산을 수직에 가깝게 깎고 옹벽을 세워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더 많이 확보해 4000억원가량의 수익을 냈다. 이수곤 교수는 보도를 보고 "광역지질도 등을 살펴보니 옹벽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중앙일보에 먼저 밝혀왔다.
이후 이 교수는 옹벽의 사전 설계와 안정성검토보고서, 현장조사 등을 통해 문제점을 파악했다. 하지만 당시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 교수는 "대선을 앞두고 정치 논쟁에 말려들 우려가 있어 쉽게 나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이 옹벽의 안정성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 아파트의 지질이 2018년 9월 붕괴한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의 지질과 같은 편마암이라는 것. 이 교수는 "편마암 지질에서, 특히 절개지 공사 시 철저한 지질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두 번째 근거로 '단층파쇄대'를 들었다. 이 교수는 광역지질도, 절개지 공사 현장을 촬영한 항공 사진 등을 통해 이 지역이 점토가 충전된 단층이 발달한 단층파쇄대임을 확인했다. 이 교수는 "단층이 많이 발달해 붕괴위험이 매우 높은 취약 지역으로 이런 지질에서는 설계와 시공단계에서 모두 철저한 지질조사가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자료를 검토한 이 교수는 "이 아파트의 경우 설계 단계에서 점토충진물의 전단 시험 값이 적절하지 못했고, 단층을 따라서 직선적으로 붕괴하는 형태에 대한 안정성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시공단계에서 굴착면 단계마다 정밀지질조사(페이스매핑)을 수행해서 단층이 어디에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3차원적으로 파악해 원래 설계단계에서 추정한 지질상태와 같은지 여부를 판단하고, 추가 보강 여부를 살펴야 한다"며 "이 현장의 경우 페이스매핑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 안정성 여부를 판단하기 불확실하다"고 덧붙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병원에서 건강 상태를 살피는 과정에 빗대 설명하면 이렇다. 그는 "병원에서 피검사, MRI 검사 등으로 원인 조사하는 것이 사전 지질조사이며, 원인에 따라 약이나 수술 등 처방하는 것이 토목공사"라며 "수술을 하면서 병든 부위를 확인하는 게 공사 도중의 굴착면 정밀지질조사와 같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2017년 성남시에서 설계 심의를 할 때 이 문제가 일부 심사위원들에 의해서 강력하게 제기됐지만, 다수결로 덮인 정황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3차례에 걸쳐 진행된 심의에서 한 심의위원이 "시민의 생명과 관련된 안전문제이므로 옹벽 안전성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확인될 때까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조건부 통과했다.
이수곤 전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산사태 최고 권위자다. 지질학 1세대인 이정환 전 국립지질광물연구소장의 아들로 토목지질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문대인 영국 임페리얼컬리지 왕립광산대학에서 한국 화강암 풍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87년 귀국해 2019년 정년퇴임 때까지 서울시립대 교수로 있으면서 산사태 연구에 매진해왔다.
이 교수는 백현동 옹벽 문제가 그동안 국내에서 일어난 대형 재난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이 교수는 "35년간 산사태, 절개지 붕괴 등 전공 분야의 재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보니 각종 재난은 서로 연결돼 있고, 대부분 사전에 징후가 있다"고 설명했다.
큰 재난이 발생하기 전 그와 관련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존재한다는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백현동 옹벽의 경우 이미 설계 심의 과정에서 사전 경고가 있었고, 수정 보완할 마지막 기회가 있었는데도 이를 놓쳤다"며 "설계 심의에서 심사위원들이 각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다시 회의록을 살펴봐야 하며 필요하면 수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 아파트 인허가 과정의 특혜 의혹에 대해 감사원이 감사를 벌였고, 지난달 대검찰청에 요청해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수사하고 있다.
이 교수가 가족 등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백현동 옹벽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대형 참사 후에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어서다. 그동안 국내 대형 재난을 앞두고 이 교수의 사전 경고가 묵살된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2011년 7월 16명이 사망한 서울 우면산 산사태가 대표적이다. 이 교수는 사고 8개월 전인 2010년 11월 우면산 일대의 산사태가 우려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제안서를 서울시장실에 제출했지만 채택되지 못했다. 2018년 상도유치원 붕괴 당시에도 그는 사고 5개월 전 유치원 측의 요청으로 현장조사 후 '단층을 따라서 붕괴할 위험성이 높다'는 자문의견서를 동작구청에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예측한 대로 절개지 붕괴가 발생했다.
이 교수는 "최근 국내에서 일어난 32건의 재난 사고를 분석해보니 전문가나 공사 관계자, 주민 등의 사전 경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흘려듣고 넘어간다"며 "일부 공익제보자는 사업 방해자로 몰리며 오히려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발생한 경기도 양주시 삼표산업 채석장 절개지 붕괴사고 역시 사고 6개월 전 한 작업자가 절개지 붕괴 위험성을 알렸지만 묵살됐고, 따돌림 등 2차 피해까지 본 사실도 있었다. 이 작업자가 붕괴 나흘 전 초기 균열 사진을 찍어 회사에 알렸지만 조치가 없었고, 결국 그의 경고대로 사고가 났다.
이 교수는 2006년부터 3년간 행정안전부 소방방재청으로부터 24억원의 연구비를 받아 국내외 전문가 100명과 함께 전국의 사면(斜面)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결과 보고서에서 그는 국내 절개지 공사에서 지질조사를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어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국내에 조사할 사면들이 전국적으로 약 100만개로 추정되므로 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이 교수는 보고서를 2009년에 산림청,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소방방재청) 등을 포함한 26개 국가기관에 배포했다. 그는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인 연구결과는 그대로 묻혔고, 제도개선에 반영되지 않아 아직도 똑같은 원인의 붕괴사고로 인명피해가 계속된다"고 했다. 그는 "각 지자체에서 산사태 관리 공무원이 몇 명밖에 없어 100만개의 실태 파악이 불가능한 현실"이라며 "특히 인명피해가 많은 소규모 민간소유 사면들은 대부분 정부의 관리 밖"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윤석열 정부에 5000만 국민이 함께하는 민간주도의 재난관리조직 구축과 공익신고자 제보시스템을 제안했다. 그는 "재난으로 실제 피해를 보는 5000만 국민이 자기 지역을 스스로 지킨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며 "지역별로 119처럼 24시간 가동하는 민간주도의 재난예방조직이 자발적으로 갖춰서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위를 받은 전문가들보다 각 분야에서 수십 년 종사한 기술자들이 현장의 문제점들을 더 잘 알고 있고,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 등 사후 처벌로는 재난에 대한 예방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했다. 또 사고 원인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대규모 인명이나 재산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반드시 재검토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고를 예방하고 관계자들이 보고 배워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간 경험상 국내 전문학회의 원인조사보고서가 왜곡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조작이 의심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며 "누구도 학연, 지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국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수곤 전 교수는 "백현동 옹벽 안정성은 지금이라도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재 '판교A아파트'는 지난해 6월 입주를 시작했지만, 성남시가 옹벽에 붙은 일부 시설에 대한 사용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다. 이에 불복한 시행사측이 성남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성남시)의 이 사건 처분은 원고(시행사)가 옹벽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보완 조치를 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 아파트 입주민들에 따르면 오는 12일 성남시가 사용승인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미 백현동 옹벽이 정치적 문제가 돼 국내 전문가들이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정부기관이 주관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과 국내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원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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