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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천황.. | 22/05/07 01:45 | 추천 35

중국 사서가 기록한 임진왜란 +20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412919736





 

 

 

[만력(萬曆) 25년(1597)] (울산성 전투)

이에 왜군(倭軍)은 성책(城柵)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도산(島山)은 울산(蔚山) 높이만 하고 석성(石城)이 대단히 견고하여 위로 공격하던 우리 군사의 손상이 많았다.

 

굶주림이 심해진 왜군(倭軍)이 거짓으로나마 항복을 해오는 체하자 공격을 늦추어 주었더니,

 

얼마 안되어 [소서(小西)]행장(行長)의 많은 구원병이 들이닥쳐 군대의 후방을 에워싸려고 하였다.

 

그러자 호(鎬)가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몰아 서쪽으로 달아나니 여러 군진(軍陣)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왕경(王京)으로 돌아오니 죽은 사졸(士卒)이 2만이나 되었다.

 

황제가 이 보고를 받고 몹시 노하여 호(鎬)를 파직시켜 심문케 하고[註765] 천진순무(天津巡撫)[註766] 만세덕(萬世德)[註767]으로 교체시켰다.

 

상세한 사실은 [양(楊)]호열전(鎬列傳)에 있다.



[만력(萬曆) 26년(1598)]10월에 (사천성 전투)

 

동일원(董一元)이 장수를 보내어 사면에서 섬을 공격하면서 화기(火器)[註777]를 사용하여 성채문(門)을 쳐부수니,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나아가 책(柵)을 뽑아 내었다.

 

이 때 갑자기 진영 안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註778]

 

왜군(倭軍)이 이 기회를 타고 돌진해 오고,

 

고성(固城)의 왜군(倭軍) 또한 들이닥치니, 군사들은 결국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달아나 진주(晋州)로 돌아왔다.

 

황제가 이 보고를 받고 두 유격(遊擊)을 참수(斬首)하여 진영에 돌리게 하고,[註779] 일원(一元) 등은 대죄입공(帶罪立功)[註780]하도록 하였다.

 

이 달에 복건도어사(福建都御史) 김학증(金學曾)[註781]이, 7월 9일 평수길(平秀吉)이 죽어서 여러 곳에 있는 왜군(倭軍)이 모두 귀국할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만력(萬曆)] 26년(A.D.1598; 朝鮮 宣祖 31) (총평)

 


왜(倭)가 조선(朝鮮)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는데도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이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는데,

 

관백(關白)[註786]이 죽고서야 화란(禍亂)이 비로소 종식되었다.[註787]

 

 

 

 

 

 

 

울산성 전투 명군 사상자 2만명

 

사천성 전투 명군 사상자 최소 7천명 이상 (조선왕조실록 기록)

 

3만명 이하 (일본기록)

 

 

 

전쟁 말기엔 명나라도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고 평가함

 

남해안에서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단 한차례도 이겨보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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