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겨울, 미 해병대 1사단 사단장이었던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소장은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영하 40도를 웃도는 추위와 수십만의 중공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차마 후퇴라고 하긴 뭐했기에 스미스 소장은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고 부르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아갔다. 미해병대 1사단은 꽤 많은 사상자가 냈지만 부대를 온전히 보존한 상태로 흥남 교두보에 도착했다
하지만 두번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전사자 시신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미해병대만 해도 약 600여명의 전사자(+ 실종 192명)를 냈다.미군들은 그 엄동설한에도 악착같이 동료들의 시신을 가지고 흥남까지 왔지만 북한 각 지역에서 철수한 유엔군과 몰려든 피난민들 때문에 수송선에는 시신은 커녕 사람조차 태우기 버거운 상태였다. 결국 상부에서는 전사자들의 시신을 현지에 매장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군은 본래 전사자 시신을 본국까지 가져가서 본토에서 장례를 치루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미군은 압도적이고 원활한 후방보급에 힘 입어 전쟁을 해왔다. 하지만 흥남철수는 그만큼 쇼미더머니의 미군조차 힘겨워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미해병대는 피해가 적어서 매장할 여유라도 있었으나 미육군 7사단은 부대 자체가 와해되서 이런 일조차 사치였다.
1950년 12월 13일, 흥남 외곽에서 해병 군악대의 나팔소리와 조총(弔銃)이 울려퍼졌다. 매장은 급하게 이뤄져서 간이 십자가 하나만 세운 작은 봉분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영결식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무덤들을 바라보았다. 뉴기니, 펠릴리우, 오키나와를 거치며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부하들의 시신을 적지에 묻어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없었다.
스미스 소장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반드시 돌아와서 데려가겠다..."
그리고 미군들은 전부 배를 타고 흥남을 떠났다. 전쟁은 해를 넘겨 2년이나 더 지속되었지만, 미해병대는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날까지도 남겨진 동료들을 데리려 흥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스미스 소장이 남긴 약속은 미결(未決)의 과제로 남아있다.
아직까지는.
(참고로 저 유해들은 지난 60여년간에 걸쳐서 북한이 조금씩 발굴하여 미국에 반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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