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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 18/12/28 14:21 | 추천 46 | 조회 467

ㅎㄱㄱ) 연극 "백석을 기억하다" 이런저런 리뷰. +34 [11]

디시인사이드 원문링크 https://m.dcinside.com/view.php?id=superidea&no=168165

아무리 서울이라지만. 구에서 운영하는 예술회관인데 얼마나 좋은 작품을 올리겠어? 라는 편견이 있었다.

게다가 딱 하루 공연. 이를 위해서 연습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극을 보고 나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내가 지역 연극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하고 무시하였는가?

난 왜 그동안 지역 연극을 이끌어가는 스텝들과 배우에 대한 무시하였는가?

어르신들도 차분하고 조용히 그리고 즐겁게 공연을 즐기실 수 있다.

가끔은 지역 창작 극들도 연출이나 극단을 보아가면서 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이런 괜찮은 연극을 지역 예술회관에서도 만들 수 있음에 고마웠다.

새삼 노원구 주민들이 부러워지더라.



클래식과 올드함. 이 두 단어는 유사한 듯 보여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어제 보았던 이 연극은 클래식함에 조금은 더 기대있었다. 6:4 정도


현대적인 변주는 거의 없었다. 정말 클래식 그 자체.

그에 따른 약간의 올드함은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그런데도 요즘엔 오히려 느끼기 어려운 클래식한 분위기가 좋았다.

시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나아지는 상황.


창의적이고 맹점을 찌르고 자극적이고 유쾌한 극들이 가득한데 가끔은 무던하게 클래식한 공연도 맛이 있더라.

평소에 먹는 산나물은 젓가락을 피하게 하지만, 가끔 여행에서 산나물비빔밥을 찾아 먹는 기분이랄까.


올드한 점이라면

대사는 백석과 시대 분위기를 알리라도 해야 한다는 듯 매우 직접적인 설명과 해석으로 가득했다. 한 40%?! 그리고 약간의 구시대적 유희. 그걸 쳐내기엔 연습 시간도 부족했을 테며 모니터링도 힘든 첫 공연이란 걸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출이나 스텝분들이 나이도 있어 보였고


이 극의 클래식함은 아무래도 깔끔한 무대연출과 백석의 시에 있다고 본다.

텅 빈 공간과 역광으로 보이는 암전 아닌 암전 퇴장.

장면과 장면은 분리되어있지만 오히려 분리되어 있음을 역광으로 그림자놀이처럼 보여주어서 오히려 괜찮았다고 할까



무대의 사이드를 돌고 도는 길로 표현하여 결국 만나게 되는 자야와 백석을 표현하는 이 클래식한 연출

요즘엔 참 보기 힘든 커튼콜까지 계속 포슬 포슬 흩날리던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 눈꽃도 좋았다.


아 약간 웃포. 올드한 방법이다 보니 무대 중간중간 눈꽃 송이가 무대 공기 흐름에 따라 한두 개 떨어지곤 했다.

이미 알 거 다 아는 연뮤덕인 나로선, 아 막판에 떨어지는구나 삘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백석과 눈과 나이든 자야 씬에서 한두 송이 떨어지니 오히려 효과인가 싶더라.

자야에겐 백석이 눈꽃 같은 존재였을 테니. 그리고 백석 자체가 순수한(정확히는 순수인지 순백인지 모를 연약한) 사람으로 나오다 보니 더더욱.

이 극에선 백석이 순수하며 고고하지만, 현실의 풍파가 다가오면 힘이 다해 밀려버리는 하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청년이라고 느껴짐.

즉각 포기하기보다 아등바등하지만 결국 자기 분량이 되지 않아서 밀려나는 거.


(자야가 백석을 보고 파도라 했지만, 오히려 백석이 견디기 힘든 파도에 휩쓸리고 그 파도를 보고 자야는 백석이라 한 게 아닐까 싶은…. 백석은 모던 보이라기보다 이상으로 가득한 여린 사슴이었음)


스토리는 김영한과 법정의 이야기와 자야와 백석의 이야기가 크로스 되며 진행되었고. 중간중간 시대상을 표현하는 장면들로 꾸며짐. 깊은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지만, 김영한이 죽기까지 영원하다 느끼고 있었던 이 둘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그려졌어. 그리고 그 이야기는 중간중간 백석의 시를 읊음으로 대사로 표현되는데 그것도 좋았음.


사실 백석의 시로 대사를 읊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그 자체로 좋았다는 게 맞음. 그중에 이 극의 클라이맥스는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읊는 백석. 만주의 조그마한 방에서, 마지막 자야가 보낸 옷을 부여잡고 "흰 바람벽이 있어"을 대사처럼 하나하나 읊는 백석이다. 손발 시리게 추운 방에서 기력이 쇠한 백석이 시구 하나하나를 읊는데 이 시가 백석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관통하는 듯해서 가슴이 아렸다. 자신에게 결혼을 강요한 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아있는 자야에게 지쳐 만주로 떠나 버러린 이 시대상에게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울부짖는 백석을 보면서 가슴이 아파지고 아려오더라. 한 인간의 슬픔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이상 추구. 그의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자야, 미쳐버린 현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남겨진 책들 넘어져도 포기할 수 없는 이상향. 타민시 연기와 정말 잘 어우러져서 이 시를 읊는 동안 백석이 무얼 바라고자 했는지 무얼 버려야만 했는지 무얼 잃어버렸는지 보였다는 게 좋았음. 솔직히 마지막 장면만으로도 티켓값 그 이상을 했음. 지역 공연이다 보니 관크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 장면에선 모두가 숨죽인 듯 집중해서 짜릿하기도 했음.


(그러니 타민시는 일 하라. 당장 일 하라)


배우들도 좋았고, 자야 역할한 배우 첫 데뷔던데. 살짝 보기 힘든 구석이 있었지만 뭐. 데뷔라면야.ㅎㅎ

음향은 타민시 마이크에서 자꾸 튀길래 쪼꿈 안타까운 정도.ㅇㅇ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미 나나흰을 보았고 덕분에 더욱더 백석과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잘 되었기에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긴 함.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었으니 이해된건 사실이라.



이 극이 정말 수작이야 말할 순 없지만, 아 오늘 하루도 좋은 극을 보았다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2만 원의 행복 그 자체.

기술적으로 연기로 합으로 연출적으로 완벽한 극보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드는 극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간만에 마음을 포근하게 그리고 은근하게 흔드는 극을 만나서 행복했다. 하루라서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막 오래 공연할 극도 아닌듯하다. 중앙에 나오기엔 너무 클래식&올드해.ㅋㅋㅋㅋ


다시 생각할수록 올드하고 클래식한 작품이다. ㅋㅋㅋ

그래도 어줍잖게 난 트렌디해. 변주를 하겠어어!!라고 말하는 작품보단 차라리 이런 말끔한 클래식&올드한 작품이 더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는 걸 느끼는 하루였음.


아,4장자리 가벼운 프로그램북과 별 다른 디자인 없이 손바닥 크기 만한 시집을 받으며 기분이 좋았음.

동네 극장이라 무시했는데 화장실도 어셔들도 티켓 스탭들도 다 너무너무 좋았다.

2만원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 노원문화예술회관 기획자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함.

우리 동네 예술 회관은 뭐하냐. 시민에게 보답하라!



+

그리고 나나흰 승백석 소취. 매우 소취. 간절히 소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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