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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5/25 16:02 | 추천 63

제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에 대해 알아보자. +495 [44]

원문링크 https://www.ilbe.com/5880775972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2mGE3

안녕 게이들아. 노무 오랜만이노

공백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 점 노무 미안하다. 임시저장한거 실수로 날아가서 처음부터 썼다. 관리 못 한 점 예쁘게 용서해줘라.

이번에는 더욱 노오력을 들여서 썼으니 예쁘게 봐 주었으면 한다.

저번는 2차대전 중 독일의 폴란드와 북유럽 침공을 다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는 프랑스 침공에 대해 알아보자.

시작한다 이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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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에서부터 독일의 4호 전차, 6월 24일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마지노 선의

프랑스군, 왼쪽 아래는 던케르크의 영국군, 오른쪽 아래는 진격하는 프랑스군 탱크)

'프랑스 침공', '낫질 작전'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하지. 그런데 당시 폴란드와 영국,프랑스는 서로 동맹 관계였어. 그렇기 때문에 폴란드는 프랑스가 자기네들을 구원해주려고 독일의 서쪽을 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나, 프랑스는 약 20km정도 전진하고 말아. 실제로 이 때에 프랑스군을 저지하기 위해 동원된 독일군은 기계화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군복도 받지 않은 부대가 있었을 정도로 무장이 빈약한 상태였는데, 이 때 영프가 재정비하고 제대로 마음먹고 들어갔으면 독일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아. 하지만 프랑스는 삽질만 하다 철수했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게 분단되었어. 결국 영프와 독일 사이엔 서로 선전포고를 해놨는데 전쟁은 안 하는 병신같은 상황이 벌어졌어. 다시 한번 말 하지만 이때는 어느 쪽이라도 당장 군대를 몰고 와서 상대편 땅으로 진격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4월 9일 독일이 북유럽을 침공했을 때에도 프랑스는 약간의 원조 병력을 보냈을 뿐, 독일 본토에는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어. 이러한 상황은 5월 10일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끝나는데, 이 기간을 가짜 전쟁이라고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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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은 1939년 10월에 처음으로 계획되었는데, 이 계획은 일단 주공을 해안 쪽으로 빠르게 진격시킨 뒤 좌익으로 확 꺾어서 벨기에와 북프랑스의 영프 연합군을 포위 및 섬멸한다는게 주된 계획이었어. 그런데 이 계획은 문제점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일단 마지노선 일대의 프랑스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지 않으면 강력한 프랑스 본군과의 충돌을 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독일군이 역으로 당할 것이라는 것이었지. 프랑스 침공 초기에 대한 독일군의 가장 큰 걸림돌은 마지노 요새였는데, 마지노 요새는 당시로써는 정말 돌파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하고 강력하게 건설된 요새로, 여기를 돌파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어. 사실 10월에 계획한 독일군의 작전은 문제점이 너무 많아서 위 지도, 즉 만슈타인이 제안한 '낫질 작전' 이 채택되는데, 만슈타인의 제안도 문제점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1940년 3월 이후엔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이 확고히 독일군의 전략으로 자리잡게 돼. 결국 독일군은 이 작전의 대성공+영프의 삽질로 인하여 프랑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쳐. 독일군의 전략 세우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서술해 보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해도 이해가 충분히 갈 거라고 생각해서 마칠께. (요약: 1.독일군이 프랑스 침공계획을 세움 2.존나 병신같은 계획만 내놓음 3.만슈타인껄로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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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유럽의 주요 군사 강국 중 하나였어.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서부 전선의 주력이었고, 그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이입어. 전 인구 중 20~30세 남성이 25%나 사망하는 악몽을 겪은 프랑스는, 이러한 독일의 행태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긴장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프랑스는 폴란드나 체코 등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과 동맹을 체결해. 그러니까 프랑스는 만일 독일이 자기네들을 공격하면 체코와 폴란드 등이 독일의 통수를 친다는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문제는 독일이 프랑스가 아닌 체코와 폴란드를 먼저 쳤다는 거야. 한 마디로 프랑스는 자기네들은 방어만 하고 주공은 동맹국들이 한다는 소리였지. 수와 질로 보자면 프랑스군이 오히려 독일보다 더 우위였는데, 거기다가 영국의 지원까지 받은 프랑스가 패전한 원인은 바로 최고 사령부의 머중급 병신력과 판단미스로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이 보고 있어. 어쨌든 프랑스는 1939년 9월 이후 내려진(말만)선전포고 이후 동원령을 선포하여 본토나 식민지 등에서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 최소한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무장을 갖춘 600만명의 군대를 보유하는 데에 성공해. 그에 비해 독일은 동원한 총 병력이 500만명, 거기서 훈련과 무장을 갖춘 병력은 350만명 안팎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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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프랑스에게는 최대의 장점,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지노 요새' 가 있었어. 위 짤처럼 마지노선은 주요 시설이 땅 속에 있고 방어 벙커만 위로 쏙쏙 올라와있는 형태인데, 위와 같은 요새가 프랑스와 독일 전 국경에 걸쳐 설치되어 있다고 하니 독일군 입장으로써는 괜히 짜증나는 요소가 아니었지. 프랑스군은 이 요새를 통해,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독일군을 벨기에 아르덴 쪽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것이며, 아르덴으로 영국과 함께 병력을 집중해 독일군을 격퇴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만일 독일군이 마지노 요새로 곧바로 진격해 들어온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쁜 일이고. 결국 독일군은 아르덴으로 왔는데, 눈 깜짝할 새에 바닷가 쪽으로 진격하여 영국군은 도망치고 프랑스군은 근처에서 삽질만 하다가 한 달만에 파리를 점령당하고 패망하지. 한편 벨기에와 네덜란드도 전쟁에 대비한 준비를 하는데, 자기네 땅이 격전지가 될 것을 예상한 벨기에는 독일군을 최대한 국경에서 막으려고 어느 정도 수준의 요새를 건설하지. 문제는 이 요새를 건설한 회사가 독일 회사여서 이 요새를 공격한 독일 공수부대는 건설 도면(...)을 작전도로 사용하는 등 너무나도 쉽게 요새를 점령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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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북부에 육군 3개 그룹이 있었는데, 2, 3육군 그룹은 마지노 요새 동부를 방어하고, 그 아래 육군 제1그룹은 가스톤 빌로테 사령군이 이끄는 부대가 서부에 위치하여 저지대 국가(베네룩스 3국)로 전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영프군의 방어 전략에 대한 계획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 작전을 뒷받침할 수송능력이나 지휘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 독일은 프랑스 침공 당시 공군력만 우위를 차지했었는데, 프랑스군은 독일보다 우수한 육군력과 기갑부대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사령부 때문에 병력을 이상하게 배치당하고 효과적으로 기갑부대를 운용하지 못해 패하였지. 프랑스군이 안이하게 대처계획을 세우는 동안 독일군은 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를 서부 독일에 집중시키고 모리스 가믈랭(영프 연합군 총사령관)과는 비교도 못할 뛰어난 명장들이 동원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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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 10일 밤, 적색 작전이 게시돼. 먼저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를 최우선적으로 공격하는데, 룩셈부르크는 1일만에 점령당하고 네덜란드는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5월 15일까지 버텨. 독일군은 5천 명 이상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헤이그를 기습 공격하고 육군을 빠르게 기동시켜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을 섬멸해. 사실 네덜란드군은 더 버틸 수 있긴 있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더 이상 버텨봐야 더 많은 사상자를 낳고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해 5월 14일 항복하지만 일부 부대가 계속해서 저항하여 5월 15일 항복문서가 정식으로 체결돼.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정부는 런던으로 도피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전쟁이 끝나자 국민들의 환영 속에 귀국해. 한편 벨기에는 6월까지 꽤 오래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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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보병, 1940년)

한편 벨기에군은 네덜란드군에 비해 침공에 대한 대비를 훨씬 철저히 하는데, 국경과 주요 거점에 요새를 쌓고(국경 요새는 독일 공수부대에 의해 점령) 프랑스군과 협동 작전을 펼쳐. 벨기에의 여러 지역에서 프랑스의 기갑부대와 독일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하늘에서는 그나마 있는 공군으로 독일군에 대해 맞서 싸우는 벨기의 공군이 항전이 전개돼. 한편 5월 12일~14일에는 대규모 기갑 전투가 벌어지나 프랑스의 전술적 패배로 끝나. 이것이 침공 초기의 B집단군 의 진격인데 프랑스군은 2주만에 A,B집단군에 의해 벨기에에 포위되고 귀중한 물자를 낭비해. 프랑스군은 병력의 배치를 효과적으로 하지 않았어. 한편 남부 전선에서는 A집단군의 진격이 개시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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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집단군의 땅크들. 교통 체증에 시달림)

독일군의 A집단군은 아르덴으로 향해 대규모 기갑부대를 진격시켜. 그런데 문제는 도로가 너무 적었고 그 도로들도 상태가 씹창이라(윗짤 참고)어마어마한 길이의 정체가 발생하기도 했어. 이 때문에 독일군은 프랑스의 공중 공격에 대해 매우 취약한 상태였는데, 프랑스의 폭격기들은 너무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마저도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어 독일군은 폭격을 거의 받지 않아. 벨기에군과 프랑스군은 대전차 무기가 너무나도 부족하여 후퇴해. A집단군은 5월 12일 독프 국경에 위치한 뫼즈 강에 도달해. 5월 14일 프랑스 총사령부는 대규모 폭격을 지시하고 공세를 명령하나, 이 역시 수포로 돌아가. 구데리안의 기갑사단은 프랑스 북부로 미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고, 결국 영프 연합군의 전차대와 독일군의 전차 부대가 5월 21일 아라스에서 대규모의 전차전을 벌이는데, 당시 독일군의 평균적인 대전차 화기의 구경은 37mm, 더 커 보았자 50mm였어. 당시 화력이 그나마 제일 강했던 4호 전차도 75mm 포를 탑재하였는데, 이 포도 너무 짧은 편이라 관통력이 종범이어서 영국군의 마틸다 전차를 상대하지 못하였지. 결국 독일군은 88밀리미터 대공포를 부랴부랴 끌고 와서 영프의 역습을 격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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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케르크 철수 당시 연합군. 5월 30일)

영프 연합군은 개전 초기부터 제대로 된 반격도 거의 못 해보고, 결국 벨기에의 34만 명이 넘는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할 상황이었어.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영국은 대륙에서 철수하기로 결심,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하는 '다이나모 작전'을 개시하기로 해. 5월 24일 독일군은 이미 뒹케르크에서 약 15km정도 떨어진 곳을 점령해. 여기서 독일군이 공세를 더 밀어붙였더라면 34만의 연합군은 꼼짝없이 포로로 잡힐 수도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OKW(독일군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공세를 중지해. 5월 27일 공세명령이 다시 떨어지고 독일군은 진격하나, 연합군은 노오력과 정성이 들어간 방어선으로 한 명의 병사라도 더 탈출시키기 위해 항전하지. 독일군의 폭격기들이 탈출을 위해 동원된 배들을 무차별 폭격하고 이를 요격하기 위해 영국의 스핏파이어 전투기가 공중에서 전투를 벌이는 등 매우 급박한 상황이 이어졌지. 총 33만명의 연합군 병력과 피난민 등이 탈출하는데, 영국군은 수만 대에 이르는 차량과 수많은 무기들을 그대로 버리고 와야 했지(그러나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여 대규모의 지원을 함 ㅎㅎ). 뒹케르크 철수 이후 프랑스군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였고, 마지노 선의 50만명까지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하면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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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파리에 입성하는 독일군 기마부대)

결국 6월 15일, 모든 정부 기관과 군대가 도망간 파리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마자 한 일은 프랑스 정부 건물들에 가서 여러 가지 문서를 확보하는 일이었는데, 먼저 1919년 베르사유 조약 문서를 확보하고, 독일 내 프랑스 스파이의 명단, 프랑스 내 유대인의 소재 파악 등을 위한 일이었어. 6월 17일 프랑스 수상 패탱은 독일에게 협상을 제의하고, 6월 22일 정식으로 항복문서가 체결돼. 이탈리아는 6월 21일 자기네들도 무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나, 소규모 국경 경비대가 결사적인 저항을 하여 깊게 진격하지는 못 하고 사실상 의미없는 희생을 해. 프랑스는 이탈리아와는 25일 휴전해. 이탈리아는 승전한 댓가로 남부 프랑스 영토를 조금 받아가. 6월 23일 이후 패탱을 국가 원수로 둔 독일의 괴뢰국인 '비시 프랑스'가 수립돼. 일본이 만주사변 이후 수립한 '만주국'과 살짝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보면 될 거야(물론 만주국은 침공을 정당화하기위해 세운 국가지. 비시 프랑스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침공자의 괴뢰국이라는 점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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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깃발이 펄럭이는 파리)

한편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샤를 드 골은 다른 몇 명의 정부 요인과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여 영국에 임시 정부, 즉 '자유 프랑스'를 수립해. 자유 프랑스는 본국의 레지스탕스 지원, 독일군과의 교전을 위한 군대 모집 및 훈련 등을 하는 등 대 독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자 드 골 등 주요 인사들이 프랑스로 귀국하면서 자동 해체돼.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조직들의 통합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레지스탕들도 우파와 좌파로 갈라져서 레지스탕스들끼리 총질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해(...) 당시 레지스탕스의 70%이상이 좌익이었다는 정확하지 않은 통계수치도 존재하는데, 레지스탕스 중에 좌익이 많았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고 해. 한편 자유 프랑스군의 규모는 45만명 이상으로, 이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1944년 8월 파리 해방까지 수많은 곳에서 연합국과 함께 싸웠다고 해. 폴란드도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폴란드판 레지스탕스인 '파르티잔'들이 독일군과 싸우고, 망명한 폴란드군 조종사들과 공수부대가 연합국과 싸우는 등 공을 세웠으나 전후 소련이 폴란드를 자동 흡수하여 폴란드는 프랑스와 같이 승전국 대접은 받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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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고랑스니뮤....ㅜㅜ)

1940년 6월부터 1944년 8월 연합국이 파리를 탈환하기까지의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기간은 프랑스로써는 매우 치욕적이었던 기간이 분명해. 독일은 수십만 명을 강제 징용해서 독일로 끌고 가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나, 비록 1942년 점령하기는 했어도 괴뢰국 형태로 자치권을 그나마 보장하고 레지스탕스 활동만 안 하면 그다지 많은 제제를 가하지 않았어. 그러나 이 기간은 확실히 프랑스에게는 매우 굴욕적이고 잊고 싶은 역사지. 프랑스 해방 이후 프랑스는 괴뢰국 '비시 프랑스'의 주요 인사들을 재판으로 처형시키거나 징역형을 때리고, 사로잡힌 독일군들 중 게슈타포(비밀 경찰)와 SS는 특별히 더 많은 형을 내리지. 프랑스와 영국이 1939년 9월 독일에게 확실히 선전포고를 하고 침공을 감행했으면 독일은 그대로 붕괴하여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아. 그런데 만약 그런 식으로 상황이 돌아갔다면 독일은 영프와 소련에게 분할되어 냉전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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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중력의 힘에 의해 수많은 폭탄이 떨어져 런던을 반 초토화시킨 '영국 본토 항공전' 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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